“당신 부인이 먼저 실례했다” 일본인 교장에 주먹 날린 JP (18)

  • 카드 발행 일시2023.08.23

5·16 이후 JP가 맡은 일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이 아니었다. 그는 혁명을 지킬 ‘음지의 무력’ 중앙정보부를 만들었다. 혁명 과업을 훼손하려는 세력들을 막는 ‘악역(惡役)’을 자처했다. ‘혁명을 뒷받침하는 무서운 존재’가 처음 위력을 발휘한 사건이 장도영의 체포다. ‘혁명’을 일으킨 지 두 달도 안 돼 명목상 혁명정부 의장을 ‘반혁명 세력’으로 권좌에서 제거한 것이다. 박정희와 사전 상의도 없이 일을 벌인 JP의 무서운 면모. 이번 회부터 잠시 ‘인간 김종필’의 성장기를 되돌아 본다.

울퉁불퉁 시골길로 리어카를 끌고 가려니 속도가 안 났다. 이른 봄날인데도 이마에 땀이 맺힐 지경이었다. 1945년 4월 7일 나는 충청남도 광천 기차역에서부터 보령군 천북면 하만리까지 30리 길을 혼자 짐을 싣고 낑낑거리며 가야 했다. 내가 교사로 일할 첫 부임지 천북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가 그곳에 있었다.

대전사범학교의 수료(교사자격증 부여 1년 과정) 성적이 좋았는데도 벽지로 발령받은 데는 사연이 있었다. 대전 동광국민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하던 1944년 10월이었다. 부친의 회갑연에 참석하려고 부여 집에 들렀다 돌아가는 내게 어머니는 곶감을 4접(1접은 100개)이나 싸주셨다. “하숙집 주인 주고, 사범학교 담임과 너 근무하는 국민학교 교장선생님 드려라. 남은 하나는 너 먹고.”

사탕 하나 구해먹기 힘든 일제 말기였다. 나는 저녁 무렵 곶감을 어깨에 짊어지고 동광국민학교 일본인 교장 기시무라 집으로 향했다. 현관을 들어서니 부엌에서 도마 소리가 들렸다. 교생 김종필이 왔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한참 불렀더니 방에서 어린 학생 딸이 나오길래 “선물이니 아버지 드려라”며 건네주려 했다. 그때 ‘선물’ 소리를 들은 교장 부인이 얼른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나왔다. 못 들은 체할 때는 언제고, 이제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곶감을 받으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