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다 죽는다” 탈영한 JP, 3주뒤 제 발로 군대 간 사연 (19)

  • 카드 발행 일시2023.08.25

1946년부터 48년까지 나의 서울대 사범대 생활은 이튼(Eton)스쿨의 꿈과 가세(家勢) 몰락의 현실 사이를 오가던 시기였다.

미 군정은 46년 7월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경성대학의 3개 학부와 9개 관립 전문학교를 통폐합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발표했다. 친일 교수 배격, 국립대 행정권 조선인에게 이양 등의 이슈로 서울대생들은 국대안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다. 주로 좌익이 주도하는 국대안 반대세력은 동맹 휴학을 주동했다. 그들은 몽둥이를 든 채 학교 정문과 본부 건물을 잔뜩 에워싸고 일반 학생의 등록을 방해했다. 나는 그들이 지키고 있는 정문을 피해 후미진 곳의 철조망 울타리 밑으로 기어 들어가 등록을 마쳤다. 당시 국대안에 찬성하는 학생들은 사각모를 쓰고 윗도리는 서울대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다녔다. 나 역시 사각모 교복 차림으로 학교를 다녔는데 그렇다고 국대안 반대 학생들과 정면으로 싸우는 일은 하지 않았다.

1949년 5월 23일 졸업한 육군사관학교 8기의 졸업앨범에 실린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맨 위 왼쪽에서 넷째). JP 왼쪽은 후에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 소장. 맨 아래 가운데는 JP가 처음 사병으로 13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할 때 불침번을 서면서 신고하지 않았던 임달순. JP는 8기 생도 시절 1대대 3중대 4구대 소속이었다. 단체사진에서 JP는 뒷줄 맨 왼쪽에 서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49년 5월 23일 졸업한 육군사관학교 8기의 졸업앨범에 실린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맨 위 왼쪽에서 넷째). JP 왼쪽은 후에 보안사령관을 지낸 강창성 소장. 맨 아래 가운데는 JP가 처음 사병으로 13연대에 입대했다가 탈영할 때 불침번을 서면서 신고하지 않았던 임달순. JP는 8기 생도 시절 1대대 3중대 4구대 소속이었다. 단체사진에서 JP는 뒷줄 맨 왼쪽에 서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그러는 가운데 고향 금성산에서 금광 개발에 뛰어들었던 아버지께서 빚을 가득 남긴 채 돌아가셨다. 대학 2학년 때다. 가산을 정리하니 시골집 한 채와 서울 안암동의 집 한 채가 전부였다. 그때부터 고학의 길이 시작됐다. 안암동 집을 전세 주고 뺀 돈으로 일제 소형 중고차인 ‘닷도산’(Datsun·영국제 오스틴 세븐 라이선스 생산) 한 대를 구입했다. 운전면허를 따 휴강시간엔 택시영업을 했다. 그러나 학비 조달이 여의치 않아 48년 6월, 3학년 1학기를 끝으로 학업을 포기했다.

‘쾅-’.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48년 7월 초, 나는 ‘닷도산’을 몰고 가던 중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으로 돌아가던 전차(電車)가 갑자기 차를 덮쳤다. 운전석은 무사했지만 차 앞쪽이 날아가 버렸다. 반파된 차를 버려두고 안암동 하숙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방바닥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각진 교모를 쓴 대학생 신분도, 일제 자동차도 모두 부유한 아버지의 은덕으로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쓸쓸히 혼자 계셨다. 재산도 모두 사라졌다. 이젠 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공주중학교 동창으로 성균관대에 다니던 김왕수를 만나 종로를 걸었다. “야, 왕수야. 이제 모든 걸 버리고 밑바닥서부터 내 힘으로 살아 가보려고 한다. 넌 어떠냐?” 진지하게 말하는 내 모습에 왕수는 “미쳤나, 이 자식이”라며 의아해했다. “사실 작년에 아버지 돌아가신 뒤 우리 집이 거덜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