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바람에 살 에는 어느 날, 최전방에 아내 옥이가 왔다 (20)

  • 카드 발행 일시2023.08.28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5일 대구 중앙교회에서 여선생 박영옥과 결혼했다. 내가 스물다섯, 아내가 스물두 살 때다. 그 아내가 2015년 2월 21일 영면했으니 64년을 해로한 셈이다. 아내의 작은아버지인 박정희 중령은 당시 9사단 참모장으로 전방에 있을 때여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전날 밤 부관(副官) 편에 결혼 축하편지와 함께 GMC트럭에 잔치용 황소 한 마리를 선물로 내려 보냈다. 그즈음 중공군은 파죽지세로 오산까지 내려왔다. 마침 밴 플리트 대장이 미8군 및 유엔군 사령관으로 취임했는데 공산군을 공격하는 요령을 미군 중에서 제일 잘 알고 있는 장군으로 통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人海戰術)엔 물량공세가 최고의 공격수단이다.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 유학 시절의 김종필 전 총리(위 줄 가운데). 훈련 중 휴식 시간에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1차 도미 유학 장교단에 선발돼 1951년 9월부터 6개월 동안 전술학과 화기학 등을 배우고, 전투기와 전차가 동원된 실전훈련도 받았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미국 조지아주 포트베닝 육군보병학교 유학 시절의 김종필 전 총리(위 줄 가운데). 훈련 중 휴식 시간에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제1차 도미 유학 장교단에 선발돼 1951년 9월부터 6개월 동안 전술학과 화기학 등을 배우고, 전투기와 전차가 동원된 실전훈련도 받았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내가 52년 말(6사단 19연대 시절) 경험해봤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이라는 게 산의 북사면(北斜面)을 기어 올라오면서 때리면 소리 나는 건 모두 동원한다. 양철통·북·꽹과리·사발 등을 두드리면서 ‘덤벼 봐’라는 뜻의 “라이라이(來來)” “라이라이”를 외치며 달려오면 뒷머리가 쭈뼛 올라선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전 같으면 대대나 연대에 하나밖에 없던 105㎜ 대포를 3~4배 늘려 대포가 주력이 되는 반격 방식을 택했다. 중공군 입장에선 여기 가도 포탄, 저기 가도 포탄이 떨어지니 정신이상 상태에 빠진다. 밴 플리트는 이렇게 중공군의 남하(南下)를 막아내고 숨쉴 시간을 벌었다. 그런 뒤 “이 전쟁은 상당히 길게 간다. 우수한 한국 장교를 대대장 요원으로 양성해야겠다”며 후보를 뽑았다. 거기서 선발된 인원이 1차 도미 장교단 250명(보병장교 150명, 포병장교 100명)이었다. 나도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 보병학교에서 훈련받는 교육생으로 선발됐다. 중공군과 싸우면서 ‘이거 장가 가자마자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미국 가라는 명령이 내려오자 ‘살았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건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