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끄러운 글만이 좋은 글 아니다"|「당신도 책을 낼 수 있다」펴낸 송우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송우씨(48)의 직업은 자서전 대필 업이다. 「스스로 자(자)」자를 염두에 둘 때 자서전은 분명「자기가 쓴 자신의 전기」로 풀이돼야 마땅할 터인데 남의 전기를 대신 써 준다니 일반의 상식으론 이상해도 한참 이상한 직업이다.
『이상하지 않다』고 송씨는 말한다. 자서전이란 자기자신이 직접 쓰는 자서전이 아니며 자기가 걸어온 길, 그 삶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남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되 쓰는 건 나(아)·남(타)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게 송씨의 지론이다.
어쨌든 송씨는 남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고 밥을 번다. 「사초」라는 대필 전문 업을 차려 놓은 지가 올해로 13년째. 그 세월을 꼬박 남의 삶만 좇아 다니며 웃고 울었다. 『남의 인생을 대신 살아 주는 사람』이라는 게 그의 입에 발린 자화상인데 거기엔 자조와 자랑의 두 감정이 엇섞여 있다.
자기 삶은 실종시키고 열심히 남의 이야기만 들어다 쓰는 신세에 대한 자탄, 그러면서도 남에게서 얻는 간접체험들을 문자화하면서 「당대의 역사 만들기」에 선 참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그것이다.
그런 송씨가 남 이야기 베껴 쓰는 일을 잠시 제치고『내 생각, 내 말도 좀 쓰자』고 작정해 내놓은 책이『당신도 책을 낼 수 있다』다.
「책을 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지침서」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내용은 자서전·회고록·개인기록을 어떻게 쓰고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을 소상하게 푼 것이다. 「책은 아무나 쓰나」라는 꽉 막힌 생각에 절어 있는 상인들에게는 혁명적 복음으로나 들릴 자못 당돌하고도 도전적인 제명이다.
『책은 아무나 쓸 수 있고, 또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남과는 다른 독특한 자기체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권 부를 손안에 쥔 사람, 고명을 떨친 사람만이 책을 쓰고 자서전을 남길 자격을 갖는 건 아닙니다.』
그는 또 매끄럽고 다져진 글만을 좋은 글로 평가하는 문장귀족주의, 저명인사만이 출판을 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서 봉건주의는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됐으며 이제는 세상의 밑바닥에 묻혀 사는 가장 하릴없는 필부필부까지도 자기 책을 써 가질 만큼 크게 문이 열린 만인저서의 시대가 됐다는 점을 강조한다.
선택된 일부인사만이 책을 쓸수 있다고 믿는 것은 역사의 상당부분을 유기 하겠다는 마음가짐과 다를 바 없다고 그는 말한다.
『6·25라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에는 무려 2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경험이 매달려 있습니다. 거기에 똑같은 경험은 단 하나도 없으며 그 2천만개의 경험이 모두 쌓이고 조합돼야 6·25라는 한 역사적 사건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겁니다.
전쟁을 수행했던 장군 한사람의 회고만으로는 6·25는 치명적인 절름발이신세로 복원될 수밖에 없지요.』
이번에 낸『당신도 책을 낼 수 있다』에는 자서전·회고록·개인기록을 써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대체 이것들의 장르적 구분과 특성은 어떤 것이며, 집필은 어떻게 하고, 자신이 하건 남의 손을 빌리건 집필에서 한 권의 책이 출판돼 나오기까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등이 아주 꼼꼼하고도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비틀거리면서도 13년을 끌어온「사초」살림의 경험이 바탕인데 무엇보다도 스타카토로 끊어 쓰는 단문형 문체에다 군데군데 체험적 예 화를 곁들여 여간 재미있게 읽히지 않는다.
그가 「보통사람」들도 자서전이니 개인기록을 써 낼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사초」란 자서전대필업소를 차린 건 1978년 6월이다. 물론 국내에서는 처음이었는데 사무실 문을 열 땐 알 만한 사람들까지 픽픽 웃었다.
첫 고객은 10년 전 자살한 시인 이상화씨. 부친 고희기념으로 시와 산문을 한데 묶은『여름 산』이란 단행본을 내주고 그 가난한 시인으로부터 5천 원을 받은 게 첫 돈벌이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13년 동안 그가 대필해 펴낸 자서전단행본이 70여권, 인물평전·르포는 3백 편을 넘는다.
이렇게 퍼낸 자서전 가운데 그가 가장 성공작으로 치는 책이 성임옥 할머니의『이조시대의 마지막 처녀』다. 선비 집안의 딸로 태어나고도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결혼마저 포기한 채 상경해 식모 살이·떡 장사·보따리행상 등의 궂은 업을 전전하며 큰돈을 모은 뒤 82년 순천공업전문대를 인수하는 것으로 어렸을 적부터 지녀 왔던 육영의 강한 뜻을 끝내 이루어 낸 한 할머니의 입지전기다.
비매품이었던 이 책은 출판 후 3년 반 동안 신문·방송·잡지 등에 무려 60여 회나 오르내리는「행운」을 누렸는데 이것이야말로『역시 진실한 삶과 글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운 가장 전형적인 예가 아닐까 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대필을 업으로 삼는 사람을 서양에서는 고스트라이터(ghost writer)라고 부릅니다. 유령 문필 인이라는 뜻이지요. 자서전대필은 남의 집을 지어 주는 일과 다를 게 없는데 누구든 새로 집을 지으면「내가 지었다」고 하지 「아무개 목수가 지었다」고는 않잖아요. 일을 이루고는 숨는 것이 대필업자의 숙명입니다.』
자서전 한편을 만들어 주고 그가 받는 돈은 일정치 않다. 없는 사람, 있는 사람을 가려 받을 만큼만 받는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렇지만 사후에 묘하나 만드는 값은 받아야겠지요』라고 그는 말한다. <용>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