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만에 부르는 '6·25 레퀴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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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어젯밤 어둠이 밀어든 고을을 버리고

오늘도 또 다시 가야만 하노니

오전 세 시

닭도 울기 전

새벽달 은갈구리 서슬 푸르른 아래

묵묵히 융의(戎衣) 떨쳐 간과(干戈)를 갖추어

나의 마땅히 의지(意志)하는 바를

원수에게 깨우치기 위하여선

이 신산(辛酸)인들

어찌 견디지 않으리

고요히 북신(北辰)의 가르치는 쪽

원수의 뒤를 쫓아 나아가노니

---유치환'보병과 더불어'중'전진'

한국전쟁의 포연 속에 사라졌다가 54년 만에 발견된 '6.25 레퀴엠'이 마침내 역사적인 초연 무대에 오른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의 시에 부산 음악계의 '대부'였던 이상근(1922~2000) 전 부산대 교수가 곡을 붙인 칸타타'보병과 더불어'(1952년작)다.

박성완(포항시향 상임지휘자, 부산대 교수)씨가 지휘하는 부산대 효원오케스트라와 진주.김해 시립합창단이 6월 20일 진주 경남문예회관에 이어 6월 24일 부산 문화회관에서 연주한다. 진주 태생인 이씨는 55년 부산대 사범대 음악교육과 초대 교수로 부임해 87년 정년 퇴임할 때까지 32년간 부산대에 몸담았다.

이 악보는 고문서 수집가 김동민(54)씨가 올해 초 발견해 본지에 처음 공개했다.

보도를 접한 경남 진주 시청에서 즉각 구입해 초연을 추진해왔다. 진주시 문화과에서는 이씨의 작품 전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

'보병과 더불어'는 청마가 51년 펴낸 같은 제목의 시집에서 '전진''전우에게''1950년의 X-마스에 부치다''결의'등 4편을 골라 관현악 반주에 의한 혼성 합창곡으로 엮은 작품. 빠른 템포와 느리고 비장한 분위기가 교차하며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피란 당시 부산에서 활동했던 해군정훈악대(서울시향의 전신) 지휘자였던 고 김생려씨에게 악보를 검토해보라고 주었다가 전쟁 통에 없어졌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관현악곡은 백병동의 칸타타'육이오'(1990년)등이 있으나 대부분 나중에 위촉된 것이고 전시에 작곡된 것은 '보병과 더불어'뿐이다.

부산대 효원오케스트라는 '보병과 더불어'와 함께 이상근씨의 합창곡'나그네'(박목월 시)와 축전 서곡'55432'등을 함께 연주한다. 진주시 문화관광담당관실 류덕희 과장은"보훈 가족을 초대해 6.25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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