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생명 앗아간 고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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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경찰의 모진 고문으로 뇌사상태에 있던 소년이 입원 37일만에 숨졌다. 한창 자랄 나이의 앳된 생명이 꿈도 펴보지 못하고 숨져간 사실에 애절함을 느낀다. 희생된 어린 생명은 그렇다 하더라도 아들을 잃은 비통과 슬픔을 딛고 아들의 장기를 살아있는 사람에게 기증한 부모의 갸륵한 뜻에 고개가 숙여진다.
무고한 철부지 소년을 데려다 천장에 매달고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한 가증스런 죄악 앞에서 우리는 도덕과 법률과 정치의 패배를 절감한다. 박종철군 사건 후 불법연행과 별실 수사, 고문의 근절을 그토록 소리 높여 외쳤건만 이번에도 박군의 그것처럼 똑같은 코스로 고귀한 생명을 짓밟아 버렸다.
현행 법문을 아무리 뜯어보아도 고문은 물론 불법연행과 별실수사를 허용한 귀절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도 박군 사건의 여진이 가라앉기도 전에 또다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과 법률과 정치가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만 것이다. 이건 고문을 자행한 경찰의 죄과를 따지기 이전의 문제다.
박군의 참혹한 죽음이 귀중하고 값진 교훈을 남겼으면 두번 다시 같은 과오를 저지르지 말았어야 했다. 그 동안 정치는 무얼 했고, 새로 태어나겠다던 경찰은 도대체 무얼 결의하고 행동으로 옮겼는지 알고 싶다.
고문과 인권유린이 말썽이 될 때마다 그럴듯한 근절대책이 쏟아져 나온다. 임의 동행형식의 불법연행을 못하게 하는 명확한 규정과 처벌규정을 신설, 보완해야 한다고도 하고 법적 근거도 없는 수사 보호실을 아예 폐쇄해야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피의자 신문 과정에서부터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게 하고 법원은 증거 없는 자백에 대해 가차없이 무죄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경찰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인권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의 실시, 고문경찰의 감시와 처벌의 강화 등 갖가지 방안들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고문방지를 위한 제도적 보완이 주된 내용이고 골격인 셈이다. 그러나 법과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게 짜여지더라도 인권유린이 뿌리째 없어지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법과 제도가 완전 무결하더라도 이를 운용하는 구성원들이 지키지 않으면 법과 제도는 형해화할 따름이다.
고문을 자행한 경찰조직의 최고책임자가 다시 중용되고 이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도덕적 풍토에서는 고문근절은 요원하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정치가 깨닫고 도덕수준의 향상이 무엇보다 긴요한 시점이다.
제도의 개선과 병행해 공권력 담당자들의 확고하고 결연한 의지가 이 땅에서 고문을 영원히 추방시키는 관건임을 다시 한번 강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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