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이젠 내가 리드할거야...."|민심 보다 폭넓게 수용|「4·13」여론 과녁 피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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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10 규탄대회에 이은 전국적인 시위격화로 정국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17일 밤 돌연 전두환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를 다녀왔다.
전당대회 후 대통령과 대통령 후보간의 첫 단독대좌란 형식에서 뿐 아니라 시국의 중대성에 비춰볼 때 이날의 청와대 회동은 특히 관심을 끌었다.
구체적인 논의내용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회동 후 노 대표의 표정이나 몇 마디 발언은 회동의 성격을 대충은 짐작케 했으며 앞으로의 정국과 관련, 몇 가지 시사를 던지고 있다.
약 4시간의 회동을 마치고 자택에 돌아온 노 대표는 기자들에게 『당신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게 국민들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지…』 라며 『이젠 내가 리드할거야』 라고 말했다.
이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지는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평소보다 힘이 들어간 말투 등으로 미루어 노 대표가 민심의 동향과 시국대책 등을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보고하고 민심을 보다 폭넓게 수용하는 방향으로 모종의 「재량」과 「배려」 를 받아오지 않았느냐는 추측을 낳게 했다.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6월10일 이후 노 대표는 시국상황에서 오는 번민과 고통을 누구보다 무겁게 느껴왔다. 『잠이 안오고 외롭다』 고 실토할 정도로 그가 처한 환경은 악화일로를 치달아 온 게 사실이다.
자신의 후보지명 자체를 부인하는 야권의 주장이 공감대를 급격히 넓혀가는 상황에서 자신이 할 역할을 찾아내는 것부터가 무척 힘든 노릇이다.
게다가 대통령과의 관계나 자신의 운신폭을 정하기도 전에 당내로부터 「새로운 노태우」 를 대망하는 소리가 높아만 가고 있다. 『도대체 무엇부터, 어떻게 손을 쓰란 말인가』 라는 하소연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노 대표가 가장 고심하고 있는 대목은 6·10 규탄대회로 확인된 민심의 기반현상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수습해 파국을 막느냐하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정치적 수렴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설정할지가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6·10규탄대회가 노 대표와 민정당에 준 가장 큰 교훈은 민심의 동향을 새롭게 파악케 한 점이다. 민정당은 지금까지 경제적 번영과 중산층의 안정희구 심리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재야의 주장에 대부분의 국민들이 경계심을 갖고 있어 다소 무리하더라도 체제 유지를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4·13 개헌 유보조치를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밀고 나갈 수 있을것으로 보았으며 야권의 저항은 공권력 행사로 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민정당은 뼈저린 반성을 하고 있다. 6·10 규탄대회가 국민들에게 공감을 얻은 것은 「개헌」 「허헌」 을 『자기들 편리한대로』 바꿔온 정부·여당에 대한 반발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야당과의 진지한 담판, 국민의사를 묻는 과정을 생략한 여권의 일방적 논리가 얼마나 무력하며 공권력 행사도 민심 앞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된 것이다.
노 대표는 이 같은 「각성」을 바탕으로 변화된 여건 속에서 여권의 정치일정을 수정·조화시키는 작업을 벌여야 할 판이다.
전권을 행사하는 대통령 밑에서 아직도 역할의 한계를 안고있지만 민정당 내에서는 『이제 노 대표가 적극 나서야할 때』 라는 요구가 높아만 가고 있다.
노 대표가 앞장서 강공·공권력 위주의 정치를 지양하고 야당과 실효성 있는 대화를 성공시키라는 주문이다. 그래야만 노 대표의 이미지도 살고 집권목표에 접근할 수 있지 「온건한 제2인자」 로 분수만 지키다가는 이도 저도 다 놓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청와대 회동 후 노 대표가 밝힌 『내가 리드할거야』 라는 말은 좀더 두고봐야 알 수 있겠지만 이 같은 요청에 대한 회답의 성격이라고 일단 볼 수 있다.
결국 노 대표가 시국타개를 위해 뭔가 해내야 하는데 그 첫 번 째 수순이 김영삼 당총재와의 회담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보고있다. 민정당 내에는 현재의 긴박한 시국수위를 낮추기 위해서는 노·김 회담이 시급히 성사돼야 한다는 절박감이 감돌고 있다. 여야양 쪽의 초 강경론을 억제하고 정치권의 문제 해결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무조건 노·김 희담이 열려야하고, 그것도 실기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높다.
그리고 최근상황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는 4·13 조치를 철회는 못하더라도 여론의 과녁으로부터 옮겨놓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결국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여권의 정치일정이 관철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런 상태로 대통령 선거가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민정당 의원 중에서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말하자면 노 대표가 4·13조치의 의미에 변화를 가해야 하며 그러자면 현행 정치적 구도에서 자신의 존재를 허심탄회하게 재고하는 시련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차기대통령의 임기, 개헌시한과 방향을 지금부터 야당과 협상해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다.
그런 바탕 위에 노 대표는 △개헌일정과 내용 △폭넓은 민주화조치 △김대중씨 문제 등에 관한 카드를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시점에서 노 대표 흉중에 어떤 카드가, 어느 선까지의 대책이 마련돼 있는지 알 수 는 없다. 그러나 당내에서는 고단위 처방이 시급히 제시돼야하며, 협상용으로 감추고 있다가는 협상자체도 하기 어렵게 된다는 주장이 많다.
아무튼 노 대표는 이제 온몸을 던져 시국문제와 부닥쳐야하는 입장에 섰다.
아직 제시하진 않았지만 노 대표의 시국수습 구상은 공권력 행사를 가급적 억제하고 민심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정부여당의 정치적 입지를 바꾸는 것을 축으로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따라서 4·13조치를 철회하지는 않으면서 개헌논의를 재개해 국민들의 개헌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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