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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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요즘 여야 정치인들은 주목할만한 발언들을 잇달아 하고 있다.
우선 민정당의 노태우대표는 『국회 개헌특위가 정상화되지 않으면 합의개헌은 힘들며, 합의개헌이 되지 않으면 파국이 올 것이고, 여야 할 것 없이 불행한 사태를 맞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구태여 유력 인사의 입을 빌지 않아도 그 동안 시정에서도 흔히 들어온 얘기였다. 그러나 누구도 아닌 바로 여당의 대표위원이 그와 같은 발언을 한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입장에 따라 「심리적 부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그러니까 뭔가 해야되지 않겠느냐』고 조바심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은 『또 세상이 시끄러워 지겠군』하고 한숨과 자탄을 할 것도 같다.
그러나 우리가 당부하고 싶은 말은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성경구절처럼 외어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무슨 묘수를 내서라도 머리를 맞대고 개헌에 합의할 궁리를 해야지, 『안되면…, 안되면…』하는 말로 불길한 예감을 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누구나 합의개헌이 안되면 큰 변이 난다고 서로 걱정만 했지 실제로 합의를 하려는 노력이나 성의는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사실 『합의개헌이 안되면』이라는 가정 아래 이러구 저러구 하는 것은 국민이 듣기엔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 그것은 어느 특정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여야 꼭 마찬가지다. 야당은 벙긋하면 합의개헌이 안될 경우 『중대한 결심』 을 한다는 말을 한다.
합의를 해야할 당사자는 누군데 남의 말하듯 합의가 안될 경우를 내세워 그처럼 겁나는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결국 자신들의 책임을 벗어나려는 심산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야당의 「중대 결심」이라는 말은 공감보다는 불안감을 준다. 길바닥으로 뛰쳐나와 데모라도 부채질한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지금 헌특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데모가 모자라 그런 것도 아니고 국민이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개헌문제의 핵심엔 아직 접근도 못하고 회의의 절취 문제로 시간과 힘을 쏟고 있지 않은가.
가령 TV중계를 하면 헌법이 더 민주적으로 되고, 그렇지 않으면 비민주적인 헌법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럴 단계는 이미 지났다. 세상의 대세가 민주헌법인데 그것을 TV중계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주장이 어느 쪽이든 실로 어린아이 같은 발상이다.
오늘 이 시점에서 개헌이라는 강을 건널 생각이라면 그 궁리를 찾는 것이 먼저 해야할 일이지, 강에 홍수가 날 걱정, 둑이 무너질 걱정을 앞세우면 건너야할 강을 건널 날은 좀체로 오지 않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여당의 「파국」 예고나, 야당의 「중대결심」 이나 모두 국민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앞날의 불안만 더해줄 뿐이다. 국회가「헌특」을 결의하고 구성한지 석달이 지나도록 회의다운 회의 한번 못해보고 벌써부터 불길한 얘기들만 내세우는 것은 정치기수에서도 그렇고, 정치인의 할 바를 생각해서도 결코 좋은 일이 못된다.
국민을 안도하게 하고, 국민이 믿거라하고 내버려 둘 수 있는 정치다운 정치를 할 수는 없는가.
경륜과 관록이 많다는 야당도, 책무와 사명을 앞세우는 여당도, 그점에서 좀더 능력과 성의를 발휘하여야 할 것이다. 국민은 파국을 예고하는 정치보다는 파국을 막는 정치를 갈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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