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신문을 기다리게 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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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토록 특징없던 신문들. 한결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개성없었던 신문들이 요즘에는 조금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얼마간 표정도 지을 줄 알고, 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하고, 웃고 우는 몸짓도 보이는 것 같다.
전철을 타면, 신문에 푹 빠져 있는 시민들이 한 둘이 아님을 본다. 얼마전만 하더라도 주로 스포츠류 신문에 심취해 있었는데 요즘 그런 것 보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신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사서 보는 시민들의 표정만 진지한 것이 아니다. 신문팔이들의 목소리도 한결 높아졌고 그 음색도 얼마간 신명난 것처럼 들린다.
몇달전만 하더라도 국민들은 무거운 무관심과 냉소주의에 짓눌려 있었다. 지난 몇년간 밖에 있다가 돌아와보니, 사람들의 얼굴에 진하게 깔린, 무섭고도 무거운 무관심과 냉소주의가 내몸에 와 닿는 듯 하였다.
그러던 것이 선거열풍이 불게 되면서 시민들은 별안간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무관심, 체념, 자학을 떨쳐버리고 관심과 참여의 정신으로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정치의 혹한 속에서 죽은 듯 행세했을 뿐, 결코 죽지 않았음을 보여준 셈이다. 왜 그럴까?
사람은 정말 <정치적> 동물임에 틀림없다. 표현과 참여의 욕구는 사람의 가장 기본적 욕구요, 이것은 곧 정치적 기본권이다. 정치는 표현과 참여를 가능케 하는 종합예술이다. 그러기에 이 기본권을 충족시켜주는 정치라는 게임에 결코 무관심할 수 없다.
사실 정치만큼 사람을 흥분시키고 감동시키는 경기는 별로 없고 그것만큼 멋진 종합예술 또한 별로 없으리라. 「정치」로서의 정치는 인간을 초연한 중립적 입장에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웃기든, 울리든, 찬성케하든, 반대케하든 어떻든지 한쪽을 선택하도록 끌어들이는 힘을 지니고 있다.
물론 정치게임이 정당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이뤄질 때 그러하다. 권투시합에서 손발을 자유자제로 놀리는 선수가 손발이 묶여 있는 선수를 일방적으로 무자비하게 공격한다면, 누가 이따위 경기를 즐기겠는가? 이것은 경기가 아니라 고문행위다. 처음에는 관객이 분노하겠지. 하나 분노의 표정 때문에 자기들도 당한다면, 그 시합에 등을 돌려 애써 무관심한 체 하거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겠지. 그러나 두 선수가 같은 조건하에서 규칙에 따라 자유롭게 겨룬다면 관객은 즐거울 것이다. 특히 두 선수의 실력과 기량이 엇비슷할 때 관객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로 이런 조건에서는 지상최대의 쇼요, 천하에 가장 재미있는 게임이 될 터이다.
게다가 정치경기는 다른 시합들과 달리 그 과정과 결과가 관객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그 영향력의 규모는 엄청나고, 그 충격의 여파도 굉장하다. 역사의 흐름을 바꿔 놓기도 한다. 야구시합이나 권투시합이 역사의 방향을 돌려놓았다는 말을 들은 적 없으나 정치시합의 결과 역사의 흐름이 가파르게 달라졌다는 사실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나는 지난해 미국 민주당전당대회를 지켜보면서 정치야말로 가장 멋진 인간드라머요, 감동어린 종합예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미국의 정치, 특히 외교정책이 갖는 구조적 비리와 한계를 뚜렷이 보고 있는 터이지만, 정당한 절차에 따라 당당히 겨루는 정치경쟁자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짜릿한 흥미의 수준을 넘어 경건한 경지에까지 인도하는 듯하였다.
특히 최초의 흑인 대통령후보 「잭슨」목사의 연설은 많은 참가자들을 감격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연설의 몸짓과 내용은 참으로 멋진 예술작품이었다. 감동에 겨워 눈물짓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TV가 부각시킬 때마다, 수천만 시청자들도 함께 눈물을 보였으니 놀라운 축제가 아닌가. 오늘의 풍요한 미국안에서도 구조적인 가난에 찌들린 사람들의 한, 피부색깔 까닭에 억울한 차별을 받은 사람들의 한, 그리고 이러 저러한 이유로 부당하게 눌려 살아온 사람들의 한을 속시원하게 대변해준 「잭슨」목사의 연설은 가장 정치적 연설이기에 가장 감동적 설교였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20년이상 정치는 곧 비능률이요, 그것은 술수요, 그것은 파쟁이며, 그것은 바로 낭비라는 공식에 의해 순치되어 왔다. 정치는 더러운 구시대의 작폐라고 몰아붙인, 참으로 추악한 반정치적 풍토가 이땅을 정치의 동토로 변질시켜 놓았다.
언론도 일단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반정치퐁토 속에서 행정만능과 행정독주가 자라서 표현과 참여의 숨통을 죄어왔다.
그결과 국민들의 불감증, 무관심, 냉소주의라는 증세가 만연했다. 이런 증세는 객체의 특징이지, 주체의 특성은 아니다. 그것은 노예의 특징이지 주인의 특성은 아니다. 이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주인의식을 가질래야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란 진실을 들으려 하고, 보려고 하고, 말하려고 하는 끈질긴 욕구를 갖고 있다. 이 기본욕구는 동토밑에서 마치 죽어있는 듯한 개구리들이 때를 알아 되살아나듯, 반드시 밖으로 표출되게 마련이다. 이것은 엄숙한 자연의 순리다. 그러기에, 국민을 탈정치화 시키면서 정치영역을 독점해온 세력은 모든 국민을 <일시적으로> 불감증에 빠뜨릴 수 있겠다.
그리고 <일부 국민을> 영원히 냉소주의에 묶어둘 수도 있겠다. 하나 <모든> 국민을 <영원히> 무관심과 냉소주의의 사슬에 매어 놓을 수는 없다. 이것은 철칙이다.
지난 2·12선거를 치르면서 국민들은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자기들이 역사와 사회의 참주인임을 깨닫고 그 두터운 정치동토의 지표를 뚫기 시작했다. 표현과 참여의 정치광장을 주체적으로 넓히려고 몸부림쳤다.
이 몸짓을 언론은 아직도 얼마간 얼어붙은 마음으로 조금씩이나마 전달해주고 있다. 신문을 기다리는 국민의 마음은 바로 여기에 있다. 넓어지는 표현과 참여의 광장을 신문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이땅의 언론매체들은 이 봄의 계절에 정치의 봄을 바라는 국민의 참된 소망을 꺾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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