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기고] 한글, 제대로 가르쳐야 경쟁력이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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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온라인에선 틀린 맞춤법을 지적하는 사람을 비꼬아 '문법 나치'라 부른다. 쉽고 빠르게 읽혀야 하는 온라인 언어의 특성을 십분 이해한다 해도 ‘곱셈추위’ ‘일해라 절해라 하지 마라’ 등을 보고 넘기기는 쉽지 않다. 꼼짝없이 문법 나치 소리를 들을 판이다.

문맹 없지만 文解수준 낮은 게 현실
한글을 읽기·쓰기로만 가르친 탓
성장단계 맞춘 언어교육 새로 짜야

초등수학이 스토리텔링 수학으로 바뀌면서 ‘우리 애는 수 셈하기를 잘 하는데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답을 못 썼다’며 속상해하는 엄마들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두 현상의 원인은 다르지 않다. 한글을 읽고 쓰기 중심으로 배운 탓이다.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을 만큼 과학적인 한글의 우수성이 역설적으로 읽고 쓸 줄 알면 끝이라고 여기게 한 것이다. 성인 문맹률 0.7%(2015년 유네스코 추정치)의 이면에는 문해율 OECD 국가 중 최저수준이라는 안타까움이 있다. 글을 읽고 쓸 수는 있으나 이해하지 못하는 성인 비율이 38%인 우리나라에 비해 OECD 회원국 평균은 22%, 교육과 복지의 선진 모델로 꼽는 스웨덴과 핀란드의 문해율은 각각 6.2%와 12.6%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아이가 책을 줄줄 읽고 받아쓰기를 잘 하면 한글을 깨우쳤다고, 뗐다고 생각한다. 읽고 쓰기에서 멈출 뿐, 소통과 지식 확장의 기본인 언어 본연의 기능을 간과한 것이다.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학습 부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아이가 글자로 접하는 세상이 온통 이해 안 되는 것 투성이라는 뜻이다. 매일매일 세상과 부딪히며 새로운 것을 얻고 성장해야 할 아이가 오히려 세상 앞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소외되거나 위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아이가 자신의 감정이나 바람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을까? 아이는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세상에서 무척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흔히 유아교육을 이야기할 때 조기교육, 적기 교육 등 언제 가르쳐야 하는지를 중시한다. 그러나 한글 교육은 시기 만큼이나 방법이 중요하다. 글자를 떼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글 교육의 끝은 글자가 아니라 생각이어야 한다. 아이가 글자를 통해 더 큰 세상과 만나고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아이의 발달 수준과 언어 환경 등에 맞춰 아이가 흥미를 보이는 방법으로 가르쳐야 한다.

모든 아이에게 같은 시기, 같은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발달 단계에 특징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 특히 유아는 놀이를 통해 배우기 때문에 ‘가나다’를 외우는 것보다 아이가 글자와 책을 친근하게 느끼도록 놀이로 가르치는 것이 효과적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한글을 읽고 쓰게 됨으로써 호기심이 커지고 생각이 자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글은 아이에게 세상을 보는 눈, 세상을 향한 자신감이 될 것이다.

세종대왕은 말과 문자가 달라 고생하던 백성들이 품은 뜻을 더욱 널리 펼치기를 바라며 손수 한글을 만들었다. 어느 언어보다도 배우기 쉬운 한글의 과학성은 서로가 잘 소통하기를 바란 국왕의 마음 씀씀이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소중한 유산의 의미를 기리자면 한글이 지닌 소통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한글 교수법을 발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언어가 소통의 기본 도구임은 변함이 없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과 소통의 중요성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지금 우리가 한글을 통해 전하는 정보의 양과 중요성은 한글 창제 전후의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다. 국가와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다음 세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소통 능력은 더욱 중요하다. 달라진 세상의 중심에 서서, 국가경쟁력의 근간이 될 아이들에게 언어 교육을 통해 키워지는 창의력과 상상력은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 569번째 한글날을 보내면서 한글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한층 깊어지는 이유이다.

변재용 한솔교육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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