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중앙문예』희곡 당선작<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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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들―아버지가 갖고 계시는 환상의 바다는 썩어 가고 있어요. 전 그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읍니다.
아버지―(크게)어허―, 시크럽다는데두.
아들―(반망적으로 더 크게)아버지는 썩어 가고 있어요. 그것도 아주 더럽게 말입니다!
아버지―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아들의 멱살을 잡고)설교하려 들지말아.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바다가 왜 썩어 가! 내게 생명의 힘을 주는 바다가 왜 썩어 가느냐구! 요 잘난체 하는 놈아. 여기서 다 같이 죽자. 바다가 보는 앞에서 훨훨 물에 짓이겨 죽자. 모든 것은 바다가 심판할거야!(아들을 밀쳐버리고 무대를 샅샅이 뒤지며) 미친 년을 찾아내. 모두 같이 죽자. 어디 숨어 있는 거야. 나와, 나오란 말이야! (부엌문으로 갈때 딸이 가로막는다)
딸―(다급하게) 없어요!
아버지―(따귀를 때리며)비켜! 이못된 년아. 천사라도 네 따귀를 갈기고 싶었을거야. 하느님도 널 용서하지 않을거야!
아들―(좇아가서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무대 중앙으로 끌고 오며)더러운 손으로 깨끗한 애를 건드리지 말아요. 피가 솟구칩니다!
아버지―(끌려가며 아들의 따귀를 친다)이 손놓지 못해!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아! 이 저주받을 놈
아들―더 힘껏 치십시오. 마음껏 휘두르세요. 마지막으로 맞는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아버지―아니 이 놈아…. 그래 어디 실컷 맞아 봐라!
아들―(울부짖으며)어리석어요. 너무나도 용기가 없어요. 어머니를 버리시든지, 바다를 떠나시든지 들 중에 한가지를 선택했어야 했어요! 그랬다면 이렇게 초라하게 죽어가지는 않았을 거예요!
어머니―(뛰어 나오며)애들을 때리지 말아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아들―(멱살을 잡았던 손을 풀며)더 치셔야죠. 어릴때 맞던 것의 반도 못 맞은 걸요? (턱을 내밀더)자아, 어서요.
아버지―(눈이 뒤집혀)날 가만히 내버려 둬!
어머니―아무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았어요!
아버지―(닥치는대로 집어 던진다. 가방과 탁자가 뒹군다. 격한 숨을 몰아쉬며)모두 떠나라, 모두! 어느 한 놈도 나룰 이해하지 못해!
아들―아버지 자신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요!
아버지―(발광을 하며)대꾸하지 말어! 답답해 미칠 지경이야! (사이)그래, 우리 모두 불에 타서 죽자.
아들―그렇죠, 불을 지르셔야죠. 아버지, 불을 지르세요. 어서요, 어서. 어서요, 어서!
아버지―(밖으로 뛰어 나가며)모두 같이 죽는 거야! 미친 놈들만이 모여 사는 집구석은 쓸모가 없어! 종자가 뿌리 뽑혀야지. 아예 멸종되어야 해!
아들―(사이를 두었다가 조용히)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절대 내다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어머니는 아들에게 대답대신 따뜻한 미소를 보낸다. 딸은 무대 후면창가에서 아버지를 초조하게 살피고 있다. 아들은 쓰러진 탁자를 다시 세우고, 가방들을 주워 침대 위에 올려놓고는 천천히 벽난로 쪽으로 가며 말을 한다.
아들―인간은 짐승이 아녜요. 멸종되지 않아요. 철학이 있거든요.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읍니다. 그 철학도 이젠 뿌리가 없어졌어요. 그러니 점차 인간은 짐승이 되어가는 지도 모르죠. 그러나 그걸 막으려는 놈이 있어요. 바다, 바다가 인간을 지탱해 주고 있어요. 그러나 그놈은 늘 수동적이죠. 그를 보는 인간의 눈에 핏기가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저주받은 바다로 밖에는 보이지가 않거든요.
딸―(흥분해서)아버지가 휘발유를 뿌리고 있어요!
아들―제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바다였어요. 그러나 아주 더럽게 오염되어 가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아버지를 모시고 떠나려 하는거죠. 원생대의 바다를 찾아서….
딸―(흥분의 도를 넘어서서 아주 무감각하게)아버지가 성냥을….
창문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무대가 붉게 변한다. 불꽃은 한없이 솟아오르며 온 세상을 붉게 채색시키고 있다. 딸은 머리를 흔들며 창으로부터 몸을 돌린다. 아들이 천천히 어머니를 의자에 앉히고는 따뜻하게 말을 한다.
아들―바다속 아주 깊은 곳에는 아주 신비로운 세계가 있을 겁니다. 아버지가 꿈꾸셨던 곳이죠.
딸―(꿈을 꾸듯)오빠….
아들―어머니는 쓸쓸한 삶을, 아버지 역시 쓸쓸한 삶을. 그러나 어머니와 딸은 아버지에겐 동반자가 필요해.
딸―(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머니―가거라. 넌 네 아버지를 닮아 바다를 사랑했었으니까. 그러나 너 혼자의 힘으로는 결코 그 세계를 찾아낼 수가 없을게다. 그리고 네 아버지에겐 여럿의 동반자가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구.
아들―(딸에게)나를 미워하지 말아라. (조용한 침묵. 사이)아니요, 저 혼자만의 힘으로써도 충분할 겁니다.
아들이 뛰어 나가자, 강한 바람에 문이 괴상한 소리를 낸다.
딸―(무감각하게 아들이 나간 쪽을 바라보며)난 아무도 미워해 본적이 없어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구요.
딸은 느린 걸음으로 서서히 어머니 등뒤로 걸어 와서 양말로 어머니의 어깨를 감싼다. 서로 아무런 말이 없다. 밖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아들―(멀어지는 소리)하하. 아버지, 칼을 가지고 왔어요. 바다의 심장을 찌르는 거죠. 힘을 합하면 바다의 십장에서 검은 피가 솟아오를 겁니다. 그리고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비의 세계로 들어 가는거죠.
아버지―(더욱 멀어지는 소리)차가운 바다, 뜨거운 불덩이. 하하.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차가운 바다와 뜨거운 불덩이.
딸―(조용히 그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다가 감정없이)우리도 떠날 준비를 해야지요.
어머니는 딸의 손을 꼬옥 잡았다가 안타깝게 풀어 버리고는 살며시 일어나 부엌문으로 들어간다. 딸은 천천히 그 뒤를 따라가서 부엌문을 닫고는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는다. 커다란 구식 가방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녀는 가까이에 있는 가방을 힘없이 열고 옷가지들을 끄집어 낸다. 우연하게도 모두가 자기 옷들이다. 그중 가장 밝은 색의 옷을 골라 자기 모에 대어 본다. 붉고 화려한 여름용 원피스다. 붉은 무대와 미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갑자기 비가 억세게 오는 소리가 들린다. 여러가지 소리들과 뒤범벅이 되어 혼란스럽다.
딸―(원피스를 몸에 재며 앉은 채로 힘없이)별안간 웬 바람. 집이 타다가 말겠네. 오빠는 비가 오는 줄도 모르고 있겠지?(옷을 매만지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근심스런 표정으로)바다 속은 춥지 않을까‥?옷을 좀 더가지고 갈 것을….
딸이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 서서히 붉은 무대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막―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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