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항로이탈, 앵커리지 공항 무선고장 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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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지는 20일 및 27일 두번에 걸쳐 전면 4페이지의 특집기사로 작년 9월 1일의 KAL 007기 격추사건을 종합 분석했다.
『불운의 항로』(20일자) 『피할 수 없었던 격추』(27일자)라는 제목으로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원인과 경위를 분석한 이 기사에서 「머레이·세일」 기자는 KAL기의 불운이 앵커리지 공항의 고주파 전방향 무선장치(VOR)의 고장에서 비롯됐으며 KAL 007기는 미소간 정보전쟁의 희생물이 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선데이 타임즈지의 KAL기 사건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KAL 007기는 앵커리지공항을 이륙한 직후부터 정상항로에서 벗어나기 시작, 첫 위치보고지점인 베델(알래스카) 상공을 지날 때 이미 12마일 빗나가 있었고 사할린 섬 남단에서 소련전투기(SU기)에 의해 격추될 때는 무려 3백 50마일이나 벗어나 소련영공에 들어가 있었다.
실수가 거의 없는 관성항법장치(INS)를 3개나 지니고 있고 노련한 기장에 의해 조종된 007기가 왜 이런 항로 이탈을 일으켜 끝내 엄청난 비운을 맞게 되었을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앵커리지 공항의 고주파 전방향 무선장치의 고장에서 찾아진다.
VOR는 공항지상에 시설된 초고성능의 방향 및 위치확인 전파송출장치로서 비행기내의 INS와 짝맞추어 비행기의 정상비행을 확인해주는 일을 한다.
그런데 앵커리지의 VOR가 그날 따라 고장나 수리를 위해 폐쇄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007기의 천 기장은 INS를 VOR에 맞추어보지 못한 채 이륙할 수밖에 없었다.
이륙직후 007기가 앵커리지공항 관제탑과 교신할 때 관제탑 측에서 『할 수 있으면 베델로 직진하시오』라고 지시한 것은 그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베델의 VOR와 INS를 맞추어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베델의 VOR도 작동되지 않는다는 통보가 무선을 타고 들어왔다.
INS에 비행 프로그램의 입력은 되어있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어있는지에 대한 VOR와의 확인기능이 결여된 상태다.
알래스카내의 케나이 기지 레이다는 KAL기가 이륙 후 10분만에 정상항로를 벗어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고쳐주는 데가 없었다.
007기는 INS에 연결된 자동조종 장치로 운항하도록 되어있지만 이륙직후부터 제 길을 벗어났다는 사실은 기능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그날 밤 KAL기를 인도한 것은 INS가 아니라 자력항법 장치인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007기 조종사는 비행기가 항로를 이탈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위치보고 지점을 지날 때마다 정상운항을 하고있는 것으로 보고한 것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007기는 17시 9분(GMT)에 니피를 지나고 있다고 마지막 위치보고를 했는데 그때는 정상항로에서 1백 80마일이나 벗어나 있었다.
보고에서 79분 후에는 다음 위치보고 지점인 노카를 지난다고 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오호츠크 상공에서 격추된 시간과 딱 맞아떨어졌다.
GMT 14시께 베리가 섬에 있는 소련군 레이다 기지는 미국의 정보정찰기 RC-135기로 믿어지는 비행물을 체크했으며 15시 51분께 또 다른 비행물이 나타나 서로 접근하는 것을 잡아냈다.
이중 1대가 KAL 007기였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들 두 비행기가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의 거리가 75마일 이상 떨어졌다고 했으나 소련측은 두 비행기의 항행을 정보수집을 위한 협동작전으로 간주했다.
당시 미국은 이 지역 주변에 정찰기를 자주 보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KAL 007기가 그 속에 잘못 들어간 것이다.
소련 측은 3대의 SU기가 007기를 뒤쫓았고 끝내는 사할린 섬 남쪽 소련영공을 벗어나기 직전(3분전) 열 추적 미사일을 발사, 2백 69명의 무고한 생명과 함께 007기는 산산조각 나버렸다.【런던=이제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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