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선지 위에 노니는 음표연상|커닝험의 무용을 보고 박용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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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커닝험」의 공연을 우리 나라 관객이 어느 정도 재미있어할까. 내게는 우선 그 점이 무엇보다 관심사였다.
지난 77년 5월, 나는 빈에서 발레페스티벌에 초청된 「커닝험」의 작품들을 볼 기회가 있었다.
「데이비드·류도어」음악의 『소리의 춤』과 「존·케이지」음악의 「여행기록』 등이 래퍼터리였는데, 머리가 크고 허리가 긴 「커닝험」이 안장다리 걸음으로 등장할 때마다 뒷자리에 앉은 하이틴의 아가씨가 깔깔대고 웃었다. 아마도 빈의 처녀 같았다.
사실 말이지 자기나라 문학전통에 긍지를 느끼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실험무용이 방정맞은 웃음을 자아낼 수도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흥』과 『멋』으로 악과 무의 정신을 삼아온 우리들도 그 예외일 수는 없다.
그것은 WASP- 즉 백인위주의 청교도적 정신세계를 대변해온 「마더·그레이엄」의 성에 도전하는 「커닝험」의 몸짓일 뿐, 유럽 음악문화의 고식적인 도식을 거부한 「존·케이지」나 우주시대의 예술을 예시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와는 그 비중을 달리한다. 「한마디로 초성을 배제한 몸짓의 일상화는 그 이상의 뜻을 함축할 수도 없고, 추상할 수도 없다. 극성을 배제한 『새로운 질서』가 불가능한 점이 바로 인간일수밖에 없는 육체예술의 한계라고나 할까.
1월 29일 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공연된 『이벤트』라는 장장 1시간30분의 작품은 내게 오선지위에 노니는 콩나물대가리(음표)의 놀이를 연상시켰다.
검은 천 5폭을 네모나게 깔아놓은 무대 위를 가끔은 신경을 몹시 건드리는 음향과는 아랑곳없이, 때로는 그 음향과 맞아떨어지는 몸짓으로 무용수들이 들락날락하면서 다양한 몸짓의 『만다라』를 전개한다. 그 중간부에서는 의자를 들고 혼자 나온 「커닝험」이 「존·케이지」의 음향과 비문답(?)을 벌이기도 한다.
피날레에서도 모두가 사라진 뒤 「커닝험」의 독무가 되는데, 황혼 뒤의 고독 같은 것이 번져 나와서 그나마 관객을 안심시킨다.
KBS는 설날에도. 섣달 그믐날 밤 빈에서 연례행사로 열리는 『질베스터·아벤트』의 콘서트를 자주 중계해서 시청자들을 어리둥절케 하더니 「커닝험」의 공연 역시 즉흥적인 기획의 일과성 해프닝 같기만 하다. <무용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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