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갑자기 민노당 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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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右)가 9일 국회에서 권영길 민노당 임시대표를 만나 인사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쌀협상 국회 비준동의안 처리에 비상이 걸렸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돌연 처리 연기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당초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16일 본회의에서 비준안을 표결처리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열린우리당이 찬성 당론을 확정했고 한나라당은 자유투표 방침을 정했기 때문에 민노당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준안 통과엔 별 어려움이 없어보였다.

그런데 박 대표는 10일 당 상임운영위에서 "쌀협상과 관련해 민노당이 제기한 처리시한 연장 등에 대해 한번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당직자들에게 토론을 제안했다. 박 대표는 "국가 간의 약속을 어기면 안 되는 만큼 연말까지는 처리돼야겠지만, 12월의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 결과를 보고 난 뒤 처리하자는 민노당과 농민단체의 요구도 살펴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농민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며 "정부.농민.국회 대표가 논의할 수 있는 회의 틀을 마련하자"고 말했다.

박 대표는 전날 민노당 권영길 임시대표의 예방을 받고 쌀협상 문제를 논의했었다. 권 임시대표가 "비준안 처리를 DDA 협상 이후로 늦추는 데 한나라당이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자 박 대표는 "한나라당은 농민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려 한다. 강재섭 원내대표와 의논해 원만히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박 대표의 말이 립서비스 수준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박 대표가 이날 회의에서 처리 연기를 거론하자 주요 당직자들도 잇따라 동조 발언을 쏟아냈다. 김무성 사무총장은 "DDA 협상 이후로 비준안 처리를 연기하자는 민노당의 제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16일째 민노당 강기갑 의원이 단식하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도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총장은 "쌀협상 처리는 민노당과 농민들의 의견에 적극 관심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기춘 여의도연구소장도 "민노당이 비준안 자체가 안 된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절차와 시기의 문제를 제기하는 만큼 시기 조절에 한나라당이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원내 지도부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졌다. 여당과 다 조율해 놓은 것을 이제 와서 비틀자니 명분이 영 마땅찮기 때문이다. 임태희 원내 수석부대표는 "협상은 계속 하겠지만 여당이 처리 연기에 응해 줄 것 같지 않다"며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박근혜 대표가 처리 연기 쪽으로 선회하는 것은 결국 농민표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 농촌에 유대의식이 있는데다 이규택.이방호 의원 등 농촌 지역 의원들이 비준안 결사 저지 방침을 밝힌 것도 부담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내에서조차 "박 대표가 표만 의식하다가 더 큰 것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불만이 나오고 있다. 한 소장파 의원은 "노무현 정권을 포퓰리즘 정권이라고 공격하더니 아무 대책 없이 비준을 미루자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포퓰리즘 아니냐"고 지적했다.

DDA 협상(12월 18일) 이후에 처리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럴 경우 연내 처리까지는 10여 일의 시간밖에 없다. 또 DDA 협상이 끝난다 해서 연내 처리가 이뤄지리란 보장도 없다. 민노당의 본회의장 점거 가능성이나 파행이 잦은 연말 국회의 특성을 고려하면 DDA 협상을 쌀협상 비준과 연계시키는 주장이 난센스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당연히 열린우리당은 펄펄 뛰고 있다. 박 대표가 생색은 자신이 내고 정치적 부담은 여당에 떠넘기려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부겸 원내 수석부대표는 "누구는 농민들에게 욕먹어 가면서까지 이렇게 하고 싶겠느냐"며 "한나라당이 차라리 당론으로 비준에 반대한다고 하는 게 떳떳하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화를 냈다. 열린우리당은 어떤 일이 있어도 16일 본회의에서 비준안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고 있어 한나라당이 어정쩡한 상태로 표결에 끌려가게 될 가능성도 있다.

김정하.전진배 기자

쌀협상 비준 늦어지면
국제합의 어기게 돼 신뢰도 타격
최악 경우 완전개방 닥쳐올 수도

쌀시장을 열지 않고 10년간 개방을 더 미룬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일본과 대만은 처음 10년간 쌀시장을 열지 않기로 했다가 중간에 개방했다. 필리핀은 7년간 추가로 시장을 열지 않기 위한 협상을 진행 중이다. 한국은 쌀협상과 관련해서는 특별대우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국회에서 쌀협상안을 비준하지 않으면 국가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경제적으로도 큰 손해가 생길 것으로 우려된다.

1995~2004년 쌀시장을 열지 않은 한국은 지난해 쌀시장 완전개방을 10년 더 미루는 대신 2005년부터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할 외국 쌀의 양을 늘리기로 했다. 정부는 이런 합의안을 올해 안에 국회에서 비준받은 뒤 시행하겠다고 세계무역기구(WTO)에 약속했다. 그러나 국회 비준이 계속 늦어지면서 한국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민주노동당과 농민단체 등은 국회 비준을 12월 18일 열릴 도하개발어젠다(DDA) 홍콩 각료회의 이후로 늦추자고 주장하지만 이렇게 되면 올해 예정된 외국 쌀의 의무수입 약속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공고→낙찰 및 계약→운송→통관 등의 절차를 밟으려면 외국 쌀 수입에 70일은 걸린다. 지금부터 수입을 해도 기한을 맞추기가 쉽지 않은데 12월 중순 이후로 국회 비준을 늦추면 올해 중 외국 쌀 수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경우 국제합의를 어기는 셈이어서 국가의 신뢰도에 나쁜 영향을 준다.

특히 한국이 국제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라로 분류되면 DDA 홍콩회의에서도 불리해진다. 농민단체 등은 홍콩회의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유지하면 쌀협상에서 유리하다고 주장하나, 개발도상국 지위 유지 여부도 불투명한 데다 국제적 약속을 지키지 않아 상대국이 문제를 제기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비준을 연말로 미룰 경우 의무수입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값싼 외국 쌀을 한꺼번에 비싸게 사와야 해 경제적으로도 손해다.

농림부 관계자는 "만약 올해 안에 국회에서 쌀협상안이 비준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쌀시장을 완전히 열어야 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는 만큼 국회가 조속히 비준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종윤 기자 <yoonn@joongang.co.kr>
사진=김형수 기자 <kimh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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