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주체성바람』역기능도 많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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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우리 학계에 짙은「주체성」바람이 불고있다. 바야흐로 주체성은 모든 학문적 활동의 가치를 검증하는 가늠자로서 등장하려 하고있다.
물론 주체성론이 거론된 것은 어제 오늘의 새삼스런 현상은 아니고 멀리 해방후로 거슬러 울라간다. 우리 학계에서 주체성론이 비교적 일찍 거론된 것은 국사학 분야였으며. 이는 일제시대를 통해 우리역사의 주체성이 철저히 훼손됐던 점을 반증한다.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대두된 국사학의 주체성론은 격하된 우리역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높이려는 학문적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났으나 주체성론이 가져온 학문내외적 공과는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제 학계의 각분야로 확산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주체성론을 학자들은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 그것이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부정적인 「바람」을 자못 경계하고 있다.
주체성론의 잘 잘못은 국사학 분야에 집약돼있다. 돌이켜 보면, 타율성에 대한 자율성, 정체후진성에 대한 발전성의 입장에서 식민사학의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해방후 당면한 과제였던 국사학계에서 주체성론의 긍정적인 성과라면 우선 실학의 참모습을 찾아낸 사실이라고 학계는 꼽고있다.
또 아직도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있는 고대사 분야에선 구석기학의 발달과 청동기 문화의 실증. 임나세의 분쇄와 발해사의 개척 등도 들고 있으며, 식민사학의 중세부재론과 경제후진론의 극복을 위한 조선후기사학의 재조명도 주목을 받았다.
한편 주체성론의 역기능은 무엇일까. 어느 학자는 이를테면 사대주의론의 극복을 위해 지나치게 억지스런 이론을 바탕으로 하거나 역사의 흐름에 거슬리는 방향에서 이뤄진다면 그것은 학문발전에 오히려 해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 정치·문화 현실에 무분별하게 일으킨 복고주의적 경향도 문제다. 부당하게 격하된 역사와 땅에 떨어진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은 영광된 역사적 황금시대만을 찾는 무분별한 복고주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저항운동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데 있으며, 민족사의 영광은 흘러간 역사속에 있는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 속에서 구하려는 적극적인 자세 속에서 얻을 수 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영웅주의의 팽배현상도 마찬가지. 지나간 역사 속에서 정치적·군사적 영웅을 부각시키는 영웅주의 사관을 제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현실까지 결부돼 주체성론의 역기능의 하나로 심화돼 왔다는 것.
학자들은 또하나, 국가주의적 풍조를 지적한다. 학문이 주체성 확립의 근거를 민족적 차원에서 보다 특정권력에서 구한다면 학문 자체가 현실속에 매몰돼버리고 만다. 한 학자는 우리역사의 주체성 문제를 대외적인 측면에서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민족사 발전의 내재적 과제와 연관함으로써 무분별한 배타성을 청산하고 미래지향적인 방향을 결정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는 주체성론의 부정적인 영향을 식민사학의 극복과점에서 힘입은 바 컸던 민족사학론이 갖고 있던 전시대적인 한계성과도 연결되며, 특히 60년대 이후 정치현실과 결부되면서 비학문적인 이론으로 증폭돼 갔던 점을 회고했다.
학자들은 주체성론의 이러한 역기능의 해소를 위해선 우선 학자가 연구한 내용을 마음껏 발표할수 있는 분위기의 조성이 필요하며, 또한 체면불구자가 이기는 현재의 황폐한 논쟁풍토를 지양, 건전한 비판토양을 가꿔나가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연구자는 스스로 담쌓는 학문을 청산하고 학자로서의 학문적 용기를 확립하는게 선결할 문제라고 강조했다.
올해도 무수한 학술행사가 열릴 것이다. 특히 올봄에 눈에 띄는 것은 한국고대사 관계 학술행사가 유난히 많다는 점. 국사편찬위원회가 계획하고 있는 세미나까지 포함하여 서너차례 열릴 예정인데, 고대사 부분은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많아 어떻게 토론을 이끌어 나갈지 관심이 크다.
우리는 굽은 나무는 마땅히 펴야하나 이를 편다면서 반대방향으로 무작정 굽히고만 있지는 않은지 부단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주체성론의 긍정적인 성과는 학문의 과학성이란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 학계에선 활발히 논의되는 주체성론의 과거를 추적, 다시금 정리·점검해 볼 시기가 아닌가 보고 있다. <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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