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호주 로맨틱 코미디 '베터 댄 섹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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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도입부는 대단히 상투적이다. 주인공은 시드니의 한 파티에서 눈을 맞춘 조시(남)와 신(여). 여자는 옷을 만들고,남자는 런던에서 동물 사진가로 일한다.

택시에 합승한 둘은 마음 속으로 '원 나이트 스탠드'(one night stand:하룻밤 사랑)를 외치지만 이심전심이 어디 쉬운가. 먼저 내린 여자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커피 한잔'을 제안하고….

호주 영화 '베터 댄 섹스'는 이런 식의 가벼운 코미디다. 가볍다고 한 이유는 다음 장면은 물론 결말까지 쉽게 짐작가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이야기.

남자가 사흘 후면 런던으로 돌아갈 예정이어서 둘은 부담없이 즐긴다. 함께 지내면서 둘 사이에는 애틋한 감정이 싹트는데 문제는 '하룻밤'보다 '맨처음 고백'이 더욱 어렵다는 데 있다.

줄거리는 이렇듯 단순하지만 농도 짙은 정사신과 남녀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발한 대사와 기법이 줄을 이으면서 관객을 즐겁게 만든다. 이전의 많은 로맨틱 코미디를 연상시키는 낯익은 장면이 적지 않아 이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빙그레 웃음을 지을 만도 하다.

감정이나 장면의 고비마다 두 주인공과 다른 남녀들이 해당 문제(오럴 섹스 등 성과 관련한 것들이 대부분이다)를 놓고 인터뷰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기법을 끌어다 쓴 것인데 표현과 표정이 더욱 솔직하고 대담해 독특한 맛을 낸다. 진지해야 할 것 같은 정사신에서도 주인공들은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놓고 끝없이 독백을 해댄다. 남의 정사신을 훔쳐보는 것만큼 섹스와 관련한 남의 생각을 훔쳐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휴 그랜트와 앤디 맥도웰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이 보여줬던, 성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말하는 파격의 재미와 일맥상통한다.

욕망에 대한 솔직한 말들이 마구 흘러나와 '야한 농담집'을 보는 느낌도 들지만 심한 노출 장면에도 불구하고 묘하게도 담백한 것은 연출의 힘이리라.

시사회에서 많은 이들이 키득거린 대사가 하나 있다.

"한번 동침한 사이에 불과한데 상대에게 뭘 요구할 순 없어." 주인공들이 차마 내뱉지는 못하고 입에서만 웅얼거리는 말이다.

'한번 동침했으니까 이제 너는 내 거야'라는 동양식 또는 기성세대식 사고방식과 상반되는 이런 대사가 우리 관객에게 또다른 웃음을 유발한 모양이다. 같은 현대를 살면서도 동서양이나 세대 간에 격차가 뚜렷한 것이 사랑과 섹스를 보는 눈이니까.

다큐멘터리 영화와 뮤직비디오를 만들던 조너선 테플리츠키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 데뷔작으로 2000년에 만들었다. 수지 포터, 데이비드 웬햄 주연. 웬햄은 '반지의 제왕'서 파라미르 역으로 나왔다. 23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참, 장면의 대부분은 여자의 집안이다. 한 디자이너의 좁은 집에서 모든 촬영이 이뤄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1972년작 '페트라 폰 칸트의 쓰라린 눈물'을 연상시킨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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