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음주측정기 절반이 경찰 창고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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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울 강남의 한 경찰서에는 30여 대의 음주측정기가 보급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는 측정기는 5대 정도. 음주측정이 있을 때마다 순찰차 한 대당 3~4개 정도를 갖고 현장에 출동한다.

이 경찰서 관계자는 "오래전부터 보관하던 것도 있고 새로 나온 것도 특별히 다 쓸 일은 없다"고 말했다. 다른 경찰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16대의 음주측정기가 보급된 강남의 다른 경찰서도 실제 사용하는 것은 5대를 넘지 않는다.

반면 일선 지구대에는 음주측정기가 한 대도 없다. A경찰서 교통과 관계자는 "원래 지구대에 한 대씩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지구대원들이 음주측정기를 이용해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어 경찰서 교통과에서 일괄 관리한다"고 설명했다. 음주단속 업무를 맡지 않고 있는 지구대가 대민 접촉 과정에서 음주측정기를 필요로 하는 경우 경찰서 교통과 직원이 대신 측정해 주는 식으로 업무를 처리한다.

경찰서에 보급된 음주측정기 대부분이 캐비닛 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에 지급된 음주측정기는 모두 6586대. 전국 교통경찰관 3900여 명의 두 배 가까운 수치다. 지구대 소속 경찰 4만 명을 고려하면 10명당 두 대꼴에 불과하지만 자동차가 많고 음주단속도 상대적으로 잦은 서울경찰청의 경우 교통경찰관과 각 지구대 경찰 1인당 0.9개나 지급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실제 사용되는 음주측정기는 경찰서별로 3~5개에 불과하다. 대당 50만원 정도 하는 측정기가 경찰서마다 수십 대씩 방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은 감사원의 감사결과에서도 확인됐다. 감사원이 올 1~3월 사이 서울과 6개 지방경찰청 소속 15개 경찰서가 보유한 음주측정기 249대의 사용빈도를 조사한 결과 128대(51.4%)가 석 달 동안 단 한차례도 단속에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석 달 동안 열 번 미만 사용된 음주측정기가 18%(45대)에 이르는 등 전체적으로 90% 이상의 음주측정기가 50% 미만의 활용률을 보였다. 감사원은 조사대상 경찰서 대부분 음주측정기 사용빈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처럼 대부분 음주측정기가 교통과 사무실에서 잠자고 있는 것은 경찰의 음주측정기 수요예측이 부풀려졌기 때문이라고 감사원은 지적했다. 감사원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음주단속이 야간에만 이뤄지는 데다 2인 1조로 단속하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수의 음주측정기가 필요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감사원은 음주측정기 사용실적이 미미한 이유를 정밀 조사해 대책을 세우도록 경찰에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경찰 측은 오히려 보급을 더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용빈도가 지극히 낮은 것에 대해서도 측정기 정밀도 유지를 위한 조사 때문에 불가피하다는 것이 경찰의 항변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일선 경찰서에서 정기검사 등에 대비해 측정기 일부를 모아 두는 측면이 있다"며 "측정 오류를 최소화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외국에서는 음주측정기를 총과 마찬가지로 개인 휴대장비로 취급하지만 우리는 여건상 교통 수요를 고려해 지급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더 많이 지급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최현철.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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