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한미외교 요람기 -한표욱|휴전회담 재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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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l953년 4월13일 유엔군과 공산군대표 사이에 상병포로교환이 합의되고 이에 따른 상병포로교환이 4윌27일까지 끝나자 교착됐던 휴전회담이 다시금 진행됐다.
공산 측에서는 이어 일반포로의 교환을 위한 여러 가지 사항을 제의해왔다.
△송환을 요구하는 모든 포로는 휴전 후 2개월 이내에 송환할 것.
△1개월 후 중립국으로 송환되기를 원하는 포로는 그곳에 보내어진 후 6개월 동안 본국의 파견원이 현지에 가서 그들을 설득시키도록 허락해 줄 것.
△중립국으로부터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즉시 석방할 것.
△6개월 후에도 중립국에 남아 있게 되는 포로들의 문제는 휴전 후 정치회담을 통해 해결할 것 등이었다.
상병포로교환이 이루어진 후부터 한국정부와 주미대사관은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정부는 막연히 중공 쪽에서 정전 반드시 바라는 것으로는 보지 않았다. 전쟁은 계속될 것이며 국토통일의 기회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휴전협상 재개기미가 짙어지면서 주미대사관은 미국정부와 유엔대표들을 상대로 집중적인 설득작업에 나섰다.
이승만대통령이 우리들에게 지시한 사항은 대략 이러했다.
①중공군은 한국에서 철수할 것. ②포로들의 자의적 송환이 보장될 수 있는 공정한 방법을 확립할 것.
③미국과 유엔은 공산군의 재침 때 한국에 전반적 군사지원을 한다는 것을 확약할 것.
④휴전 후에도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 재정 및 경제원조를 계속할 것
⑤한국을 분단상태로 남겨두는 협정은 어떠한 것이라도 법적 효과를 가질 수 없다.
특히 이때쯤에는 우리 대사관의 신경이 『1백만 명의 중공군이 그대로 남은 채 휴전이 되면 한국의 장래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는 안보문제에 쏠려 있었다.
l949년에 거론했던 한미상호방위협정 얘기가 이때부터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클라크」 유엔군사령관 등에게 서한을 보내 방위협정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 당시 내 나름대로의 분석으로는 국가간의 분쟁을 풀어 가는 것은 항상 포커게임과 다를 게 없는 것 같았다.
이 대통령은 약소국 입장에서 미국에 순응하여 휴전협정에 협조하면 칭찬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자살을 재촉하는 행위밖에 안 된다고 보았다.
이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판단 위에서 우리들에게 포커게임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리한 여건조성을 미국에 대해 촉구토록 지시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약해 그것으로서는 미국을 상대로한 바겐(흥정)이 안 되게 돼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측은 한국측의 이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방위협정에 관한 언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이젠하위」는 53년 붐 「클라크」에게 휴전협정 마무리를 지시했다. 그러나 「클라크」는 확실하게 한국이 휴전에 협조한다는 약속을 밝힐 때까지 이 사실을 한국측에 알리지 않을 속셈이었다.
이에 따라 휴전협상에 임하고 있던 유엔군 대표단은 「아이젠하워」의 지시를 구체화, 휴전회담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결정적인 제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에는 마지막 단계에까지 비밀에 붙여졌다.
이 제안은 53년 5월25일 유엔군수석대표 「해리슨」 장군에 의해 공산측에 제시됐다.
①본국송환을 거부하는 약4만7천명의 포로를 인도·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로 구성된 5개국 중립국위원단의 관리하에 두고 인도군이 감시 임무를 맡는다.
②본국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에 대해 약1백90명의 공산측 대표가 포로수용소를 방문해 4계윌 동안 본국송환을 설득하고 설득에 불응하는 포로 문제는 휴전 후의 정치회담에서 취급한다.
③정치회담에서도 포로문제의 타결이 불가능할 경우 정치적 망명처를 요구하는 포로들에게, 유엔이 자유세계에 거처를 정하도록 주선한다.
당시 한국군으로서 유엔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최덕신(당시 소장)은 이 제안을 공산측에 제시하는 당일 아침에야 알게 됐다.
그리고 이 대통령도 같은 시각에 경무대를 방문한 「클라크」 장군과 「브리그스」 주한대사로부터 이를 통보 받았다.
이것은 독립국가의 주권에 관련되는 중대문제였다. 그리고 한국인 포로를 석방한다는 조항도 빠짐으로써 공산측 요구에 그대로 양보하는 것이며 자유송환원칙을 고수해온 정부방침에도 위배되는 것이었다.
한국정부와 국민은 크게 놀라고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대표는 이날 회담에 불참함으로써 한국정부의 공식적 태도를 대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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