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는 「한국의 색깔」김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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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시멘트 담구석의 옹색한 자리에서 뾰죽이 얼굴을 내민 개나리 한줄기가 노란 색깔의 봄을 열고 있다. 한여름의 장미보다도 수백갑절 반갑고 기특할 수가 없다. 그것은 내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어느 무엇보다도 의미가 있는 듯 했다.
작년겨울은 도무지 추워 소품 한두개를 제작했을 뿐 멍하니 세월만 보냈다.
작가가 그림을 못그릴 정도로 집안이 추웠으니 마음 편할 날이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더구나 정치엔 관심이 없지만, 도대체 답답한 것뿐이다. 우울하게만 지냈던 겨울이라 그래서인지 개나리의 노란빛이 그처럼 큰 자극과 희망을 주었나보다.
사람은 색깔을 먹고 산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것도 민족의 인습이나 환경에 따라 틀리게 먹는다. 빨간색이어야 할 고추장종지에 파란색 고추장이 담겨있으면 아예 징그러워 구역질이 나는 것도 민족의 인습 때문이요, 옥색치마저고리 대신에 회색치마 저고리를 입은 봄날의 여인도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봄은 다른 나라에 비해 한결 밝고 뚜렷하다. 개나리와 더불어 진달래가 상징되듯이 분명한 색깔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벚꽃보다는 한층 무게가 있고「유럽」의 「튤립」보다는 훨씬 화사한 새 맛을 갖는다.
노란저고리에 연분홍치마를 입은 소녀를 보면 고향의 봄을 보는 듯 귀엽고 친근하기만 하다. 그러나 「유럽」도시의 한복판에서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면 모두들 놀라고 눈이 휘둥그래질 것이다.
색깔에서 오는 특이한 맛(이질감) 때문에 그냥 스치질 못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평범한 생활에서도 늘 보고 지나는 색깔은 눈에 익게되고, 또한 그걸 은연중에 먹고 살아가는 것이다.
환경과 인습은 한민족의 색깔까지도 만들어준다. 가령 신라문화의 석조예술은 풍부한 화강암이었고, 백제의 도자기는 전라도 해안지방의 좋은 흙이 있었던 환경의 탓이다.
근래 우리 사회에는 국적·미상의 외래색깔이 들어와 안방구석까지 파고들어 앉아있다. 부엌의 식기에서부터 가구·전기제품·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가 없다. 색깔의 개발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선진기술이나 제품색깔을 그대로 모방(?)하고있는 실정이다. 세계가 좁아지는 현대생활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는 얘기도 나올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숨어있는 것이다.
지금 코흘리개 꼬마들이 이러한 색깔 속에서 10년, 20년을 자라면서 눈에 익는다면 뒷날 한국민족의 색깔이 무엇인가를 어떻게 느낄 것인가. 노란저고리를 입은 소녀를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외국인처럼 안된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필자가 우리 나라 어린이를 대상으로 색깔조사를 한 적이 있다. 매우 놀라울 정도로 색깔이 변하고 있다. 심각한 증세다.
겨우내 센티해진 내 예민성의 탓으로 공연히 우려해 본 것일까….노란 개나리를 보며 색깔을 음미해본다.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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