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6)제 72화 비관격의 떠돌이-김소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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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엉터리「소년의 벗」>
3월 초순의 동경은 눈이 내려 한얀데다 여기저기 눈 녹은 자국이 남아있어 길이 질었다. 밤차로 오면서 잠도 옮게 못 잔데다 외투 없는 학생복 차림에는 바람이 꽤나 차가왔지만 긴장한 탓인지 별로 추위를 몰랐다.
동경 천지에 아는 사람은 하나가 없다. 그러나 찾아갈 곳이 한군데는 있다.
「소년의 벗」이란 잡지사-역전에서 전차를 탔다.
나는 대판에서 이 소년잡지를 신문광고로 알고 두어 차례 투고한 적이 있다. 사우가 되면 여러 가지 특전이 있다고 해서 나도 1년치 지대를 내고 사우가 되었다.
「공문」(아끼마)라고 써 붙인 셋방 광고를「가라마」라고 읽어 곁에 사람이 고쳐 준 기억이 있다. 그때의 내 일어능력은 겨우 이 정도였다. 그런 내 실력으로 소년시를 써서 잡지에 질려졌다는 것이 내 딴에는 대견했다. 그 시의 선평에도 몇 마디 찬사가 적혀 있었다.
동경 땅에 아는 얼굴이라고는 개 한마리도 없으니 찾아갈 곳은 거기밖에 없다. 사우가 되면 학교도, 취직도 알선해 준다고 했다.「본사 사옥」이라고 설명이 붙은 커다란「빌딩」사진도 잡지에 질러 있었다. 거기를 찾아가 취직자리를 의논하리라-. 그리고 우선 야간중학에라도 다니리라- 이것이 내 설계였다.
「고이시가와꾸 묘오가다니쑈오」(소석천구명하곡정)- 구명은「문경구」로 고쳐졌지만, 그「묘오가다니」는 지금도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있다. 내기 찾아갈「소년의 벗」사기 거기있다.
학생이 많고 서점이 많은「진보쬬」(신보정)를 지날 때 차장이 외치는 소리가 내 귀에는「빔보오표」(가난뱅이동리)로 들려서 처량한 마음에도 그 이름이 우스웠다.
「가스가표」(춘일정)를 지날 무렵 차장이 표를 끊으러왔다.
서슴없이 7전을 내 놨더니 헤어보고 1전이 모자란다고 한다.
동경은 대판보다 1전이 더 비싸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그려나 내 주머니에는 그 1전이 없다.
얼굴을 붉힌 내게 차장은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다.「명하곡정」라고 하자『그럼 얼마 안 남았으니 다음에서 내려서 걸어가도 멀지 않다』고 한다. 거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전차가 다음 정류장에 닿았을 매 나는 차장이 서 있는 뒷문으로 내렸다. 내릴 때 차장이 내 손에 종이 조각을 쥐어주면서 내 귀에다 나지막하게 일러주었다. 『다음 전차를 타라구…. 』 전차가 떠난 뒤 손을 펴 보니「펀치」를 넣지 않은 새 회수권 대여섯 장이 쥐어져 있었다.
동경에서 내린 첫날 내게 맨 먼저 은혜를 베풀어 준 것은 이 차장이었다.
다음 전차로 목적지인 명하곡정에 닿았다. 지금은 메워져서 흔적이 없지만 60년 전 그 당시는 동네이름 그대로 깊은 골짜기가 있었다. 그 골짜기를 오르고 내려서 겨우「소년의 벗」사를 찾아냈다.
잡지에서 본 커다란「빌딩」이 아니요,「제이동향관」이란 간판이 걸린 하숙집이다.
내 키 만한 그 간판 옆에 두어 뼘 되는 작은 문패-「소년의 벗 편집부」라는 그 문패를 보고도 그것이 지방 소년들의 코 묻은 푼돈을 거두어 가는 엉터리 잡지사란 것을 그 자리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현관에 들어서서「소년의 벗」사를 찾아왔노라고 했더니 한참 뒤에 웬 중년사내 한사람이 2층에서 내려봤다.
내가 대판서 온 아무개라고 하자 그 사내는 부르퉁한 표정 없는 얼굴로『왜 미리 편지라도 하지 않았느냐면서 이 역시 전차표 두 장을 내게 주었다.
그리고는 내 뱉는 어조로『취직이 어디 그리 숴워?』하고는 올라오라는 인사 한마디 없었다.
「도떼라」(솜을 둔 실내의)차림의 그 중년사내가 아마「소년의 벗」의 사장 겸 편집장 겸 급사였던 모양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맥없이 현관문을 나왔다. 실낱같은 희망은 동경에 내린 겨우 두어 시간만에 속절없이 끊어져 버렸다.
그 하루에 나는 온 동경을 헤맸다. 그 시절 시내 전차는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몇번이고 승차권을 끊어주었다. 한장 표로 세 번, 네번 바꿔 탈수도 있다. 전차표만은 부자다. 그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끝에서 끝까지 전차가 가는 곳이면 어디고 가 보았다.「스가모」폐병원(소압폐병원)도 그날 보았고 거기서 30리 떨어진「가메이도덴진」(귀호천곤)도 그날 구경했다. 사신으로만 보았던「사이고오·다까모리」(서향강성)의 개 한마리를 데린 동상도 상야공원에서 그날 처음 만났고, 일본 천황이 산다는 궁성의 이중교도 그날 처음 보았다.
대진재로 해서 지금은 자리를 옮긴 신전교-, 밤 10시쯤 되었을까-, 나는 그 다리 곁에 서서「룸펜」들이 불을 쬐고있는 다리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 보고있었다.
전신이 녹아드는 것 같은 피로-, 주림이니 추위니 하는 그런 감각보다 쓰라림도 슬픔도 아닌 일종의 허탈감에 몸이 끌려 들어갔다. 어디고 그저 드러눕고만 싶은데, 불 쬐는 사람들 곁으로 가면 이것저것 물을 것이 귀찮았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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