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년 지난 후엔 이런 영화 만들 필요 사라지는 세상 되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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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호 06면

“제86회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은…‘노예 12년’!”

흑인 감독 최초 아카데미 작품상 스티브 매퀸

지난 2일(현지시간) 2014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던 할리우드 돌비 극장. 시상식 최고의 영예인 작품상 수상작이 발표되자 카메라는 재빨리 스티브 매퀸(45) 감독을 잡았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격한 환호와 함께 스태프들을 얼싸안더니 무대에 올라서는 시상자 손에서 트로피를 낚아채듯 건네받아 힘차게 들어올렸다. 수상 소감 순서에선 “여러분에게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며 A4용지를 꺼내들고는 덜덜 떨며 고마운 사람들의 이름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더니 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껑충껑충 뛰기까지 했다.

무대 뒤 프레스룸에서 스크린을 통해 현장을 지켜보던 기자들 사이에서도 폭소가 터졌다. “맙소사. 너무 귀엽잖아” “우리가 아는 스티브 매퀸 맞아?”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는 게 모두의 마음이었다. 세 번째 작품으로 그해 세계 최고의 영화를 만든 필름맨이라는 인정을 막 받은 터였으니.

독립투쟁을 하다 투옥된 아일랜드 공화국군의 처절한 단식투쟁을 다뤘던 ‘헝거’, 섹스 중독자 뉴요커의 뒤틀리고도 공허한 삶을 그린 ‘셰임’에 이어 잔혹한 노예 제도를 고발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웅변한 그다. 늘 폐부를 찌르듯 무겁고 아프고 힘겹고 진지한 영화만 만들어온 그가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고 아이처럼 폴짝이며 어쩔 줄 몰라 할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노예 12년’은 철저히 스티브 매퀸의 영화다. 노예 제도를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그의 오랜 바람은 150여 년 전 짐승만도 못한 열두 해의 노예 생활을 견뎌냈던 솔로몬 노섭의 실화를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날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루피타 뇽도, 제작자 자격으로 작품상 수상 소감을 밝힌 브래드 피트도 모든 공을 매퀸에게 돌렸다.

‘노예 12년’에 대한 매퀸의 강한 애정이 같은 작품으로 각색상을 받은 극작가 존 리들리와의 갈등으로까지 번졌었다는 사실 역시 이날 프레스룸에선 큰 이슈였다. 매퀸은 영화의 각색 과정에도 깊이 관여했지만 리들리가 그와 공동 집필로 이름을 올리길 거부해 불화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이날 시상식에서는 리들리와 매퀸이 수상소감에서 의도적으로 서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웃지 못할 상황까지 벌어졌다.

시상식 직후 매퀸이 250여 명의 기자가 모여 있는 프레스룸 마이크 앞에 섰다. 가장 먼저 나온 질문도 그 ‘점프’에 관한 것이었다. 한 기자가 “오늘같이 기쁜 날 가만있기도 힘들겠지만 그렇게 뛰는 모습은 의외였다”고 말하자 매퀸은 여전히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완전히 무아지경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다니.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니. 그래서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움직이고 감정이 튀어나왔다. 밴 헤일런의 노래도 있지 않나. ‘점프!’라고.”

매퀸은 이번 수상으로 86년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로 작품상을 수상한 흑인 감독이 됐다. 그런 맥락에서 ‘노예 12년’의 수상은 할리우드와 흑인 커뮤니티 전체에도 큰 의미였다. 매퀸은 “역사의 뒤편에만 가려져 있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이제 수면 위로 떠올라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분명 진보하고 있다”며 “우리가 아픈 과거를 직시하고 포용할 수 있는 때가 됐다는 의미 아니겠느냐”고 수상의 의미를 되새겼다.

여전히 강요된 노동과 억눌린 삶을 사는 전 세계 2100만 사람들에게 이날의 영광을 바쳤던 매퀸 감독. 어느덧 다시 진중한 눈빛을 반짝이며 “150년 후에는 누구도 이런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게 되길 바란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에 걸맞은 위엄과 보다 나은 세상을 갈망하는 한 영화인의 열정이 동시에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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