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 양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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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불교에 「사무 양심」이라는 말이 있다. 소승의 「중아함경」, 대승의 「남본열반경」 등 경전에서 비롯된 말이다. 일체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의 네 가지.
중생이란 정직이 있는 생물을 뜻한다. 「유정」이라고도 한다.
그 속에는 『여러 생을 윤회한다』 『여럿이 함께 산다』 『많은 연이 화합해 비로소 생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사무 양심」 중의 하나는 「자무 양심」. 한량없는 (무량)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 처음은 자기가 받는 즐거움 (락)을 남도 받게 하기 위해 먼저 친한 사람부터 시작해서 일절 중생에게까지 미치게 한다.
그 다음은 「비무 양심」. 남의 고통을 벗겨 주려는 마음. 역시 자기 주변에서 시작해 멀리까지 미치게 한다. 세 번째는 「희무 양심」. 다른 사람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다. 마지막으로 「사무 양심」이다. 무식을 체로 하여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원한을 버리고 원·친의 구별을 두지 않으려는 마음.
이와 같은 「무 양심」들은 일방에서 베푸는 것만은 아니며, 서로 베풀고 서로 받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사무 양심은 비단 종교의 경지가 아니라도 사회의 기본적인 도덕률이 됨직하다. 어느 세태를 두고 보아도 모든 불행의 화근은 「사무 양심」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탐욕에서 시작되었다.
흔히 독선과 아집은 남의 의를 외면하거나 짓밟는 일로 나타난다. 이것은 역사의 한 장면에서도 볼 수 있고, 또 우리의 사사로운 생활에서도 경험하는 일이다. 자무 양심을 불태우는 작은 한 줄기의 빛이라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산다면 무의 세상은 한결 훈훈해 질 것이다.
요즘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는 갖가지 터무니없는 사기 행각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는커녕, 무거운 짐을 지워 주는 무리들이었다.
사무 양심이 없는 세태는 모든 사람들을 고립시킨다. 즐거움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고, 고통은 오로지 타인만의 것이라는 사고 방식은 곧 불신을 낳게 한다.
그런 사회야말로 냉혈·비정의 사회인 것이다. 이웃은 사랑의 존재로 반갑기보다는 불신의 존재로 두려워지게 된다. 이웃이 없는 정치·경제·사회는 삭막하기 이를데 없다.
우리 나라 불교계의 한 지도자는 오는 29일의 「초파일」을 맞아 「메시지」를 발표했다.
『불신의 쇠사슬을 거두어 그 불 신성을 깨닫게 하여 영원한 사무 양심을 갖게 하자』-.
「사무 양심이」-, 이 한 마디가 어느 때 보다도 웅변처럼 우리의 귓전을 울리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초파일」을 맞는 소박한 좌우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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