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제26화>내가 아는 이 박사 경무대사계 여록(147)|김현철<제자 윤석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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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경제시책(하)>
전후복구 및 부흥사업을 위한 미국의 원조는 1957년의 3억7천여만 달러를 「피크」로 연평균 2억5천여만 달러에 이르고 있었지만 이 원조자금의 사용방법을 둘러싸고 나는 미국측과 애먹는 교섭을 벌여야했다.
전재복구와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주어진 미국원조가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했다는 비판들을 흔히 듣는다. 사실 어느 의미에선 전후미국의 그 막대한 원조는 우리의 경제가 건전한 성장의 터전을 갖추는데 유용하게 쓰여지지 못했다.
이것은 우리의 상업이 처음부터 황폐 한데다 전쟁후의 폐허, 그 속에서의 「인플레」등 당장에 닥쳐있는 문제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그 무렵 정부로서는 미국의 원조가 건설과 공업화에 보다 많이 집중 투자돼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있었다.
그러나 미국원조당국은 악성「인플레」를 막고 경제안정을 이룩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원조불의 사용을 놓고 우리정부와 미국원조당국과의 견해의 차이는 줄곧 계속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좀더 공업화에 치중했더라면 한국의 경제발전은 가속도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국 경제안정과 공업화를 절충한 선에서 원조자금이 집행되었지만 내가 재무·부흥장관 재직시에 공업화가 다소간 늦어진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l957년부터는 연평균 50%이상씩 오르기만 하던 물가가 안정추세로 자리잡히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박사는 경제정책에 관한 한 장관책임 하에 일하도록 맡겨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일해 갈 수 있었다.
때때로 이박사가 나의 재정 또는 부흥정책 가운데 물어보거나 반대의견을 내는 일이 있지만 그때마다 『사정이 그렇게 됐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읍니다』하고 말씀드리면 그대로 수긍하는 것이었다.
이 박사가 경제문제에 직접 관여한 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달러 환율의 인상문제였다. 미국 측은 실세보다 훨씬 낮게 교환되고 있는 달러 값을 올려야 한다는 요구를 끈질기게 했다.
그러나 이 박사는 미국서 환율을 올리라고 요구하면 『도와준다는 나라가 환율을 올려 경제발전을 저해시킬 수 있느냐, 환율 올리는 것이 미국을 위한 것인가, 한국을 위한 것인가』고 따지고 들어가 미국관리는 머쓱하게 물러가기 일쑤였다.
경제전문가로서 나는 경제원칙상 환율을 적정 선에서 조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이 박사에게 환율의 조정을 건의한 일이 있었다.
이 박사는 내 말을 듣더니 노발대발하며 『안 된다』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이 박사는 환율을 올리면 안정기조를 유지해야할 판에 「인플레」가 악화되고 경제전반에 충격이 줄 것을 염려한 것 같고 그래서 l955년 조정된 5백환대 1달러의 환율이 자유당정권의 막이 내릴 때까지 계속된 것이다.
이박사의 장기적인 환율 고정정책은 일종의 고압적인 외교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 파견된 미국의 경제관리 가운데 유엔 한국재건부흥위원장으로 오래 근무한 「콜터」장군이 이 박사를 특히 좋아한 것으로 기억한다.
「콜터」장군은 이 박사가 원하는 대로 거의 응해주었고 임기를 끝마칠 때까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미국 측과의 경제원조문제를 교섭하는 일은 거의 나의 전권 하에서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되도록 이 박사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을 생각에서였고 미국관리들도 그 한계를 지켜 교섭에 응해줬다. 교섭과정에서 미국 측이 고집을 부리면 『우리의 정치적·경제적 사정이 어쩔 수 없으니 양보해달라』고 요구, 비교적 원활하게 처리했는데 나와 「콤비」가 맞았던 사람이 「유솜」처장 「원」씨와 「길렌」씨였다.
「길렌」씨는 특히 나를 도와주려고 애썼다.
이 박사는 미국에서 하도 오래 지냈고 미국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아 미국 측과의 교섭은 항상 적당한 선에서 실리를 거두었는데 나 스스로도 감복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경제안정을 추구한 나머지 나는 각부예산을 일률적으로 5%씩 삭감한 일이 있었다. 물론 각 부처에서 항의가 빗발쳤지만 경제안정은 이박사의 기본정책이기도 해서 그대로 밀고 나갈 수가 있었다.
이 박사가 경제안정을 중시한 것은 경무대 국무회의에서 『현 경제안정정책에 만족하지 말고 공무원이 봉급만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고 또 농민과 노동자들이 그들의 수입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경제안정책을 적극적으로 촉진하라』고 지시한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이박사의 지시는 물론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지만 국민생활의 기본문제에 관련, 종종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계속>

<편집자주=김현철씨의 글은 2회로 끝내고 다음은 건국초기 이 박사의 외교적 입장을 막후에서 도운 모윤숙씨의 글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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