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공식상품 납품업체 연쇄부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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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태릉에서 소규모 가방 공장을 운영하는 한모(38)씨 집의 달력 요일 표시란에는 '월'자가 없다. '월'자만 보면 지난해 월드컵이 떠올라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한씨가 칼로 오려냈기 때문이다.

한씨는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월드컵 로고가 찍힌 가방 5억원어치(이하 소비자가격 기준)를 월드컵 공식상품 국내 사업권자인 코오롱TNS월드에 납품했다. 그러나 코오롱TNS월드는 월드컵 직후인 2002년 7월 파산했고, 물품 대금으로 받은 어음을 은행에서 할인했던 한씨는 은행의 빚 독촉을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됐다.

경기도 일산의 한 창고에는 ㈜트윈인터내셔널이 생산한 월드컵 공식 티셔츠 50만장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이 회사는 투자비 20억원을 고스란히 날렸고 직원도 30명에서 13명으로 줄였다. 지난해 여름 온국민을 붉은 함성과 4강의 감동으로 이끌었던 월드컵. 그러나 그 그늘 속에서 수많은 영세업자들이 신음하고 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됐던 공식 상품은 3천억원어치 중 1천억원어치도 채 팔리지 않았다.

코오롱TNS월드에 납품한 1백4개 중소업체는 1백90억원의 부도를 맞았다. 코오롱TNS월드의 중개로 국제축구연맹(FIFA)과 직접 계약을 하고 한가지씩 상품을 생산한 1백33개 업체도 사정은 비슷하다. 하청.재하청 단계까지 포함하면 수만명이 연쇄 부도.신용불량.가정 파탄의 수렁에 빠져 있다.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한 사람이 그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함은 마땅하다. 그러나 '국책사업'임을 강조하며 생산을 독려한 정부와, 사업권자를 자격 미달 업체로 바꾸도록 압력을 행사한 한국월드컵조직위원회(KOWOC)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월드컵 개막 불과 6개월 전에 뛰어든 코오롱TNS월드는 마구잡이로 품목을 늘렸다.

코오롱TNS월드에 납품한 재고(약 3백50억원어치)는 현재 법원에 넘겨져 창고에서 잠자고 있다. FIFA와 라이선스 계약을 한 업체의 재고는 1천5백억원에 달한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피해 업자들은 최근 협의체를 구성해 공동 판매를 추진하는 등 재기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이미 끝난 행사'를 기념하는 물품들이 뒤늦게 얼마나 팔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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