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공 교역 19년-파란 부른 「주4원칙」까지의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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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른바 중공수상 주은래의 4원칙이 던진 파문은 일본산업계의 대 중공자세를 양분하는 소동을 빚고있다.
중공이라는 시장에 침을 흘리는 강철과 화학비료 메이커들은 가볍게 「이커너믹·애니멀」의 속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대의명분을 좇아 중공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일본의 된 산업계는 명암이 엇갈린 양상을 노정하고 있다.
일본이 중공과의 교역을 하고 있는 방식은 중공이 지명한 우호상사가 하는 우호무역과 준정부간 협정으로 하는 각서무역의 두 가지가 있다.
민간 베이스의 무역은 52년부터 시작, 58년4월 제4차 민간무역협정이 장기에서의 중공기 모독사건으로 중단되었다가 60년8월부터 우호상사방식에 의해 부활되었고 62년2월과 68년2월에 조인된 의정서를 기초로 중공이 지정한 일본우호상사가 매년 춘추2회 열리는 광주교역회에 참가, 거래를 성립시키는 우호무역으로 정착했다.

<각서무역형식은 63년부터 시작돼>
각화무역은 62년 주은래 초청으로 중공을 방문한 일본 정계인이 그해 11월에 맺은 준정부간 협정으로 ①63년부터 67년까지의 제1차5개년 무역기간 중 연평균 수출입거래총액을 3천6백만 파운드(1억불 강)로 하고 ②일본은 철강재, 화학비료, 농약, 농업기계, 농기구, 플랜트 설비를 수출하고 중공은 석탄, 철광석, 대두, 옥수수, 소금, 수수 등을 수출하며 ③거래 계약은 쌍방관계자가 개별적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 협정에 조인한 중공의 요승지와 일본의 고의의 머리글자를 따서 LT무역이라 약칭)
LT무역은 67년, 제2차로 장기협정을 맺을 예정이었으나 좌등 내각의 중공경원정책으로 연기되었다가 68년3월 1년 기한협정으로 하고 명칭도 일-중공 각서무역이라고 쳤다.
이번 주4원칙은 70년도 협정연장에서 나은 것이었다.

<60년대 후반부터 거래액 감소 경향>
각서무역 규모는 ▲67년1억5천3백만 불 ▲68년1억5천3백만 불 ▲69년 1억불 ▲69년 7천만 불로 점감하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일본·중공의 무역이 시작된 이후 그 총체적 규모는 매년 확대되어 66년의 수출입액은 6억2천1백만 불로 일본의 대 공산권 무역 중 1위, 전체적으로는 미·호·가에 이어 4위를 점했었다.
그 원인은 60년 이후 중공-소 대립격화로 중공이 대소교역을 줄이고 62년 이후 중공의 농업생산증대로 화학비료, 건설자재의 왕성한 수요가 있은 데다 지리적으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67년에는 만년이후 처음으로 전년비 수출 8·5%,수입12%가 줄어들고 이후 지금까지 계속 감소 경향을 보이고 있다.
홍위병 소동과 66년 이후 중공이 시작한 제3차5개년 계획이 차질을 빚고 있는 데다 중공시장쟁탈전의 격화, 그리고 무역역조에 대한 중공의 불만이 큰데 그 까닭이 있다.
이들 원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은 60년대 중반 이후 서구제국의 중공시장 진출이 활발해 졌다는 것이다.
서구제국은 구주의 경기침체 때문에 수출 압력이 커지자 새로운 시장으로 중공에 눈을 들렸으며 때마침 중공의 제3차 5개년 계획에 의해 건설자재, 공업용원료 등의 수요가 확대되는 것과 맞추어 서독을 비롯한 이태리, 화란, 백이의, 룩셈부르크 등이 기계류, 철강 등을 수출하여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정경일치」책략에 말려든 「정경분리」>
중공이 수입하고 있는 품목은 일본과의 교역 실태에서 보면 ▲화학품이 전체의 34·2% ▲기계 기기가 15·3% ▲금속품이 11·5% ▲기타 39%로 60%이상이 제2차 산업품 (67년도 기준)이며 수출품목은 1차 산품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일본기업들은 구두선 처럼 내세우는 정경분리와는 정반대로 중공의 정경일치책략에 굴복하고 서구제국과의 경쟁에 뒤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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