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고건의 공인 50년 (64) 5·18 광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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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이 광주 도심의 도로에서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 [중앙포토]

청와대 정무수석직 사표는 군부의 의지에 반하는 처신이었다. 사표를 철회하라는 강권과 압박이 있을 수 있었다. 전남도지사를 마치고 청와대로 오면서 전별금 한 푼 받지 않을 만큼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다. 아무리 서슬 퍼런 군부라 해도 약점 없는 나를 잡아넣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까지 버텨야겠다고 다짐했다. 펜을 들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한다’. 사직서의 내용은 간단했다. 그리고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이제 정무수석으로 해야 할 일이 없는 것 같아서 사직하고자 한다. 사직 후에 지병인 신장결석 치료차 입원하겠으니 나를 찾지 말아달라’고 적었다.

 최광수 비서실장 앞이라고 봉투에 쓰고 사직서 1장, 서신 1장을 넣었다. 비서실장실에 전화를 걸었더니 이송용 행정관이 받았다.

 “내가 아주 중요한 서류를 올려 보낼 테니까 내일 아침 비서실장님 출근하시는 대로 드리세요.”

 사표라는 얘기는 안 했다. 내 차를 운전하는 신판근 기사를 불러 사직서를 넣은 봉투를 비서실장실에 올려 보냈다. 이 보좌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받았다”는 확인도 받았다. 내 공직생활 세 번째 사표였다.

 청와대 신관을 나섰다. 어느새 밤이 깊었다. 시간은 오후 9시를 넘어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차를 타고 경복궁 앞 정부중앙청사를 지났다. 탱크가 청사를 완전히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차창 밖으로 봤다. 한없이 무거운 마음이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김유후 청와대 법무담당 비서관은 군인이 막아 국무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다.

 서울 청량리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아버지에게 전말을 설명하며 “사표를 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위동 내 집으로 갔다. 도착하니 시계는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장위동 집에서 다시 칩거를 시작했다. 『열국지』를 읽었다. 그런데 1~2일이 지나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태를 지인들에게서 걸려온 전화로 알게 됐다.

 5월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하진 않다. 늦은 저녁 집으로 전화가 왔다.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고 지사,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 지사가 청와대에 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전화 너머 김 추기경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중간중간 말을 잇지 못했다. 추기경이 울고 있었다.

 “추기경님…. 전 사표를 제출하고 민간인 신분이 돼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데 목이 메었다. 수화기로 울먹이는 추기경의 목소리를 들으며 함께 울었다.

 17년이 흐른 1997년 5월 18일 광주 5·18 묘지(현 국립 5·18 민주묘지)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열렸다. 한 달 전 국무회의에서 5월 18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다. 정부 주관으로 기념 행사를 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묘역에 기념으로 나무를 심었고 향도 피워 올렸다. 그리고 국무총리로 연단에 올라 기념사를 했다.

 “5·18 민주화운동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의로운 시민들의 궐기이며 항쟁입니다. 5·18 정신을 자유·정의·민주의 숨결로 부활시켜 후손들의 가슴에 담아주는 것이 영령의 희생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지금도 가끔 80년 5월을 떠올린다. ‘만약 내가 그때 사표를 내지 않았더라면….’ 나는 자동적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이 됐을 것이다. 광주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분명히 현장으로 가 중재를 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계엄군의 발포를 막을 수 있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아쉬움만 남을 뿐.

정리=조현숙 기자

[이야기 속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0년 5월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의 집권과 비상계엄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이 주도했다.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계엄군은 시위를 무력 진압하기 시작했고 수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90년 광주민주화운동보상법, 95년 5·18 민주화운동특별법이 제정되면서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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