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검색결과
-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양력설·음력설의 대립과 공존은 언제부터?
1930년도 조선민력.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매년 한국인용으로 양·음력 대조와 절기 등을 기록한 ‘조선민력’을 발간했는데, ‘민력(民曆)’이라는 이름에는 ‘관존민비(官尊民卑)
-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한겨울 한강에서 얼음 뜨던 사람들, 일시에 일자리 잃다
1920년대 한강의 채빙(採氷) 모습을 담은 엽서. “추운 나라에서는 그리 진기한 장면이 아니지만 긴 톱과 갈고리로 얼음을 뜨는 저 백의(白衣)의 무리는 이채롭다”는 설명이 붙어
-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양력설·음력설의 대립과 공존은 언제부터?
1930년도 조선민력. 조선총독부는 1911년부터 매년 한국인용으로 양·음력 대조와 절기 등을 기록한 ‘조선민력’을 발간했는데, ‘민력(民曆)’이라는 이름에는 ‘관존민비(官尊民卑)
-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현모양처·신사임당·현대의 한국 주부
파주 자운서원의 신사임당과 이원수 합장묘. 묘역의 제일 위에는 율곡 부인 묘가 있고 그 아래 차례로 율곡, 율곡의 형 부부, 율곡 부모 합장묘, 율곡 맏아들 묘가 있다. 옆에는 율
-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일본 군국주의 시절 ‘박력’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1929년 조선박람회 광고 엽서. 30년대 초까지 일제는 익명의 인물로 ‘조선’을 상징할 때에는 언제나 여성이나 노인 사진을 썼다. 노쇠·유약·순종 등을 한국인의 ‘민족성’으로 각
-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 ‘독립’… 일제시대 모든 출판물에서 사라졌던 단어
1916년의 서대문형무소 전경. 사진 왼쪽 맨 끝에 독립문이 흡사 형무소 대문처럼서 있다. 1987년 서대문형무소가 폐쇄될 때까지 독립문 앞은 형무소 앞과 같은 뜻으로 쓰였다. 일
‘전우용의 근대의 사생활’에 대한 영상 검색결과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