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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해상도발 대비 만전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가 17일 하오 국방부 회의실에서 서종철 국방장관 주재로 열려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 상태 등 국군이 당면하고 있는 국방 분야 전반에 걸친 문제점을 재검토, 임전

    중앙일보

    1973.12.17 00:00

  • (432)통신|지원작전

    「통신」은 공병처럼 기술과 전투를 겸하는 주요 지원병과다. 근대전에서 통신은 일선부대지휘나 전후방의 연락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뇌신경」인것이다. 통신병은 작전수행을위해 보병전투

    중앙일보

    1973.03.07 00:00

  • (425)|지수작전⑪|병참②

    50년 8월15일 인천·부산 보급 창을 해편, 창설된 부산기지 보급 창은 낙동강 교두보를 지키느라고 고투하고 있는 국군의 보급을 위한 각종 미군지원 병참물자를 집적 보관하는데 전력

    중앙일보

    1973.02.16 00:00

  • (424)지원작전(10)|병참(1)

    병참은 보급 지원의 핵심병과로서 5개 종목의 군수 보급품 중 제5종(탄약)을 제외한 제1종(주·부식), 제2종(피복), 제3종(유류), 제4종(장비 품)의 조판과 보급을 담당하며

    중앙일보

    1973.02.14 00:00

  • (407)경무대사계|고재봉

    5월4일 새벽3시 소위 개성지구 38선 경비 인민군 대대 2천여명이 중화기로 개성시를 향해 남침을 자행했다. 이날 4시반쯤 개성시내 신관지서후방에서 전투가 벌어져 155고지와 1

    중앙일보

    1972.03.14 00:00

  • (275)적의 춘계공세(4)

    적의 춘계 공세가 시작될 때 한국군은 도함 9개 전투 사단이 전선에 배치돼 있었다. 서부의 미제1군단 산하에는 국군 제l사단(사단장 강문태 준장)이, 그 우측의 미 제9군단에는 제

    중앙일보

    1972.01.10 00:00

  • (214)남과 북의 포로수용소(6)

    한국전쟁 때 북한에는 벽동 화풍 천마 우시 외귀 만포진 삭주 북진 강동 황주 등 10개소에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물론 전쟁추세에 따라 수용소 규모가 달라지고 폐쇄, 혹은 신설된 것

    중앙일보

    1971.08.13 00:00

  • (163)-(6)「6·25」 20주… 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 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1) 「맥아더」원수는 지형과 해상조건 때문에 「유엔」군이 인천에 절대 상륙하지 않는다고 적 측은 판단하고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신념은 첩보 활동의 확인으

    중앙일보

    1971.04.16 00:00

  • (145)학생의용병(2)

    (상) 학생들이 단일부대로 큰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희생을 낸 것이 장사동 상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을 위장하기 위한 양동작전의 일환으로서 동해안의 장사동에서 벌인 이 작전에는 대부

    중앙일보

    1971.03.03 00:00

  • (39)6·25 20주 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남과 북의 형세(2)

    북괴가 남침을 어떻게 빈틈없이 서둘러 준비했는가를 알기위해 당시 북괴에 있다가 그후 자유를 찾은 몇 민간인의 증언을 더 들어보기로 하겠다. ▲김백봉씨(당시 북괴 최승희무용연구소교

    중앙일보

    1970.06.29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