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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석률 높은 대의원 세미나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실시하는 시·도별 대의원「세미나」가 17일 충북에서부터 시작됐다. 「세미나」엔 충북도내 1백27명의 대의원 중 1백25명이 참가해 좋은 출석률. 4일간 24교시의

    중앙일보

    1973.04.17 00:00

  • 국민회의는 13일 상오 곽상훈 운영위원장 주재로 운영위원 간담회를 열고 국민회의의 기본사업계획과 당면문제에 관해 협의하고 이같이 결정했다. 『대의원으로 하여금 통일의지를 조직화하

    중앙일보

    1973.04.13 00:00

  • 통일주체국민회의 첫 운영위 개최

    박정희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은 29일 국민회의 운영위원회 위원장에 곽상훈 대의원(서울성북), 간사에 엄대섭(공주), 엄창섭(대구)·박윤종 대의원(광주)을 각각 지명했다. 운영위원회

    중앙일보

    1973.01.29 00:00

  • 박정희 대통령을 선출|제 8 대로 통일주체국민회의 1차 회의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23일 유신 총법에 따른 대통령선거실시를 실시, 박정희 대통령을 임기6년의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재적대의원 2천3백59명 전원이 참석해서 실시된 투표에서

    중앙일보

    1972.12.23 00:00

  • 박 대통령, 후보등록

    23일 실시될 통일주체 국민회의의 대통령선거에 박정희 대통령이 22일 상오 후보 등록을 했으며 국민회의 사무처는 이를 접수, 바로 공고했다. 곽상훈 대의원(서울 성북 제7구·전 국

    중앙일보

    1972.12.22 00:00

  • 지명인사 거의 당선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으로 입후보했던 저명인사들은 대부분 당선됐다. 곽상훈(전 민의원의장) 박종화(예술원회장) 임영신(전 중앙대총장) 박두병(대한상의회장)씨 등 정계·문화계·실업계의

    중앙일보

    1972.12.16 00:00

  • 큰방만 몰려 총무단서 진땀

    제헌절 24주년 기념식이 삼부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17일 상오 서울 시민회관에서 거행됐다. 기념식장엔 곽상훈·허 정·이 인씨 등 제헌의원과 전직의원 80여명, 고재필·김봉환(공화)

    중앙일보

    1972.07.17 00:00

  • (507)|내가 아는 이박사 경무대 사계 여록(134)|곽상훈

    (9) 이 박사와 유 석의 결별은 거창 사건에서다. 거창 사건이란 공비토벌을 위해 거창군 신원면에 파견된 보병11사단 9연대 3대대 대대장 한동석 소령이 부역혐의가 있다고 해서 현

    중앙일보

    1972.07.11 00:00

  • (500)|내가 아는 이 박사|경무대 사계 여록(127)|곽상훈

    이 박사의 지도자로서의 자세에 대한 얘기를 하다보니 부산정치파동 얘기를 하게 됐지만 독선적인 대통령이 되게 된 데는 그 성격과 함께 정치적인 여건도 크게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할

    중앙일보

    1972.07.01 00:00

  • "들어와 보면 어려움 알 것"

    『정작 정권을 맡고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었다.』박정희 대통령은 5·16 열 한 돌인 16일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11년 전 그날을 이렇게 회상하

    중앙일보

    1972.05.17 00:00

  • 서울회전으로 유세결산

    여야는 투·개표세 대비하는 포진을 서두르면서 14일 최대규모의 집회가되는 서울과 부산의 유세대결에 나섰다. 공화당은두도시에서67년대통령선거당시의득표수준(서울=공화60만표·신민68만

    중앙일보

    1969.10.14 00:00

  • 가시밭길 헌법20년|17일 제헌절을맞아 엮어본성년사|개헌 다섯번의 기복

    5·10 국회의원선거를 두어달앞둔 1948년 3월중순의 어느날 한국민주당의 김성수씨와 독립촉성국민회의 신익희씨는 헌법학자인 유진오씨를 초치, 『우리나라의 기본법이될 헌법초안을 만

    중앙일보

    1968.07.16 00:00

  • 헌정 19년|개헌 아홉번 수난의 역정

    6·8 총선 후 정국이 수습의 길을 모색하고있는 가운데 제19회 제헌절을 맞았다. 지난 19년의 한국헌정사는 이나라 미주정치의 성장과정이었다고는 하지만 수난의 연속이었다. 52년의

    중앙일보

    1967.07.18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