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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음 장비 먹통…외면받는 '타향살이' 국민가수 고복수 음악관
국민가수 고복수 선생의 동상. 청춘 고복수길 입구에 세워져 있다. 김윤호 기자 일제시대 트로트 곡 '타향살이'로 유명한 고복수(1911~1972) 선생 기념시설이 외면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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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탈북자’ 그 소리에 피가 맺히네
유자효 시인 고등학생 때쯤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어릴 적 친구가 오셨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어머니의 친구를 뵌 적이 없었습니다. 제 기억 속의 어머니는 늘 몸빼 차림으로 바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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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모르고 살았다, 60여 년 아코디언에 미칠 수 있었다”
사람 속으로 팔순 ‘대통령의 악사’ 심성락 | 박정희·전두환·노태우 행사 때 연주가수 10명 중 9명 노래 반주 도맡아연주곡 7000곡, 음반 1000장 달해 심성락은 네 손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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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 이매방 별세
승무·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 [사진 중앙포토] 승무와 살풀이춤의 대가인 우봉 (宇峰) 이매방(李梅芳) 선생이 7일 오전 9시쯤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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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공연 캘린더] '방귀대장 뿡뿡이와 마법사 아그작' 外
꽃 향기 가득한 봄이 다가왔다. 이럴 때 봄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이나 전시회를 찾아 문화생활을 즐기면 어떨까. 천안·아산 지역 곳곳에서 3월 한 달 동안 다양한 공연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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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영상 오가며 농염한 듯 아련하게 댄스, 댄스, 댄스!
어셔홀 앞에 설치된 김형수 교수의 설치 작품 ‘미디어 스킨’ 1 에든버러성. 1947년 시작된 영국 에든버러국제페스티벌(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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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 길 걸은 조선, 일제식민지·민족 분열 가져와"
강만길 1970년대 중반부터 분단 극복을 화두로 삼아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몰두해 왔다. 78년 낸 저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통해 그때까지 학계에서 연구가 금기시돼 온 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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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평화 통일 말고는 길 없어 … 북핵 포기와 동시에 북·미, 북·일 수교해야”
강만길 1970년대 중반부터 분단 극복을 화두로 삼아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 몰두해 왔다. 78년 낸 저서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통해 그때까지 학계에서 연구가 금기시돼 온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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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문화유산 잘 보존해 쇼핑·관광 연계 테마의 거리로
박성민(사진) 울산 중구청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중앙동 일대를 걸어다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명동이나 부산의 서면 못지 않은 번화가였던 이곳을 다시 부흥시킬 방안을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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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춤의 길 77년, 승무·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이매방 선생
1926년에 태어났다. 일곱 살 때부터 기생들 사이에서 춤을 배웠다. 해군에 징집됐다 도망쳤다. 숨어 지내던 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목포까지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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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의 눈물' 작곡가 손목인씨 별세
"타향살이 몇해던가/손꼽아 헤어보니/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으로 민족의 설움을 달래준 원로 작곡가 손목인 (孫牧人) 선생이 9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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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가요계 이면사(13)|고복수
내 아내이자 동료인 황금심이 가요계에 나온 것은 1935년이다. 본명은 황금동이고 16세때 「데뷔」했는데 열 서너살 될 때부터 내가 잘 아는 터였다. 황금심의 집은 지금의 청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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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2)
초기의 유행가는 「레코드」로서 보급되었다. 지금처럼 「라디오」나 TV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노래는 직접 극장에 가서 듣거나 아니면 「레코드」로 전파되었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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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제자는 필자|가요계 이면사(1)
고복수씨는 1929년 콜럼비아·레코드 회사에서 주최한 전선가요 콩쿠르에서 1등 당선함으로써 가요계에 데뷔, 『타향살이』·『짝사랑』등 많은 인기 곡을 불렀다. 1955년 은퇴 후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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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무성 영화 시대 (11)|신일선
이귀영 감독의 『승방비곡』과 『수일과 순애』 등이 나온 것은 아리랑 2편 직후였다. 그후 내가 다시 데뷔할 34년까지의 영화계는 문자 그대로 전멸 상태였다. 1년에 2편씩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