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 (392)|경무대 사계|윤석오

    (가) 정-부통령선거가 다가오자 한민 당을 떠난 뒤 낙원 동 자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성재 이시형 선생이 나섰다. 그는 나라의 장래를 생각할 때 우남과 백범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중앙일보

    1972.02.25 00:00

  • (391)|경무대 사계(18)윤석오

    (다) 헌법 심의 과정에서 국호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한데 대해 대한이라면 일본에 합병 당한 대한제국이 연상되어 좋지 않다는 반대

    중앙일보

    1972.02.24 00:00

  • (390)|경무대 사계(17)|윤석오

    ㉯ 헌법기초 위가 다룬 헌법초안은 유진오씨 혼자서 독자적으로 만든 안이 아니라 원래 해 공 선생이 해방되던 해에 조직한 정경연구회가 검토하여 작성한 것이다. 해 공은 정부수립에

    중앙일보

    1972.02.23 00:00

  • (389)|경무대 사계(16)|윤석오

    ㉮ 국회는 6월2일 제3차 본회의에서 헌법을 만들어 30명의 기초위원과 10명의 전문위원을 뽑아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기초 위는 유진오씨 안을 원안으로 하고 권승렬

    중앙일보

    1972.02.22 00:00

  • (388)|경무대 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좌익세력의 집요한 「테러」로 숱한 파란을 겪었지만 선거는 치러졌다 개표결과는 무소속85석, 이박사의 국민회 55석, 한민당 29석, 대회청년단 12석, 민족청년단6석, 이밖에 군소

    중앙일보

    1972.02.21 00:00

  • (387)(제26화>경무대 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유석은 그의 주동으로 군정정무회의가 만든 「남조선조치요강」때문에 군정 연장을 획책한다해서 크게 몰린 일이 있다. 이 조치요강은 당시 안재홍 민정장관의 비서였던 이교선씨가 이화장으

    중앙일보

    1972.02.19 00:00

  • (386)경무대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이화여전 출신 여류의 모임인 낙랑 클럽의 「유엔」한위 환영 「파티」에서 「메논」이 모윤숙 여사에게 매혹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 박사는 직접 모씨에게 전화를 걸어 「메논」을 잘 구워

    중앙일보

    1972.02.18 00:00

  • (385)경무대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이화장을 구하자 날씨도 추워져 부랴부랴 몇 군데만 손질을 한 뒤 서둘러 이사했다. 이 수리 때 방을 뜯어 서양식부엌으로 개조하고 구들장을 뜯어 두었다. 둘 곳이 마땅치 않아 황비

    중앙일보

    1972.02.17 00:00

  • (384)경무대 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주위사람들에게 통칭「마담」으로 불리는 프란체스카 부인의 이 박사 건강에 대한 보살핌은 과도할 정도로 철저했다. 이때도 정치인이나 실업인은 물론 시골유지들까지 마포장엘 많이 찾아봤

    중앙일보

    1972.02.16 00:00

  • (383)경무대 사계|윤석오(제자는 필자)

    『각하, 이승만 박사 부인이 왔습니다.』 『무슨 귀찮은 소릴 또 하려고 찾아 온 거야….』 『출타 중이라고 할까요.』 『그럴 수가 있다면 좋겠지만… 들여보내요. 단 면회시간은 5

    중앙일보

    1972.02.15 00:00

  • (382)-제자는 필자|경무대 사계(9)

    『귀관은 어째서 이 박사의 도미를 방해하고있나.』 『네, 죄송합니다. 그러나 각하, 이 박사는 미군정에 비협조적입니다. 군정시책의 거의 전부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방해하고 있기 때

    중앙일보

    1972.02.14 00:00

  • (381)-제자는 필자|경무대 사계(8)

    이 박사는 비서들에게 필요이외의 정담은 거의 하지 않았지만 산책에 함께 따라 나섰을 때면 이따금 심경을 말하곤 했다. 「하지」를 『바보 같은 장군』이라고 맞대놓고 욕해준 뒤라고

    중앙일보

    1972.02.12 00:00

  • (378)-제자는 필자|경무대 사계(5)

    ㉯ 조선「호텔」서부터 돈암장 초기까지 이박사의 생활비와 활동비는 한민당에서 지원했다. 처음에는 매달 7만원씩 부담하다가「인플레」도 있고 해서 15만원까지 올랐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앙일보

    1972.02.09 00:00

  • (377)|경무대 사계(4)|윤석오

    돈암장으로 이사한 뒤에도 이 박사 주변에는 많이 사람이 모여들어 그의 일과는 무척 분주했다. 윤치영씨 부처와 임영신씨가 공사살림을 맡아 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윤씨

    중앙일보

    1972.02.08 00:00

  • (376) |경무대 사계 (30)|윤석오

    『오! 여러 친구들, 이렇게 다함께 와주어 고맙구먼.』 17일 군정청 회의실에서 기자 회견을 끝내고 「호텔」로 돌아온 이 박사는 내객들을 반갑게 맞았다. 『제가 ○○○입니다. 기

    중앙일보

    1972.02.07 00:00

  • (375) |경무대 사계 (2)|윤석오

    45년10월16일 하오 5시 한대의 미 군용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중절모를 쓴 백발의 노신사가 「트랩」을 내려 한참이나 주위 풍경을 응시했다. 그를 마중 나온 것은 군정청의

    중앙일보

    1972.02.05 00:00

  • (374)|경무대의 사계 (1)||프롤로그

    경무대-. 세종로 1번지 대통령 관저의 사라진 옛 이름이라기보다 오히려 이승만 박사와 그의 통치l2년이 연상되는 이름이다. 경복궁의 일부로 연무장·과거장 또는 왕의 친정 장소로 쓰

    중앙일보

    1972.02.0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