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반년 전 무시당한 보고서…박정희 “6월 북한이 침략할 것” (109)

  • 카드 발행 일시2024.04.0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이 100회를 넘기며 곧 최종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JP의 인생은 박정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얽힘의 관계였습니다. 마지막 회를 앞두고 김종필과 박정희가 함께 겪은 북한과 미국을 소개합니다. 역사를 ‘교과서’식으로만 요약해 외우면 그 시대를 직접 겪고 헤쳐간 이들의 심성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정치적 구호와 같은 한 줄의 규정만으로 그 시대를 단정하면 사실상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셈입니다. 먼저 6·25를 6개월 전에 침공 시점, 규모, 공격 루트와 주력무기, 중공군의 참전까지 예견한 박정희와 김종필의 육군 정보국 이야기입니다.

떨어집니다. 대구경 포탄이 아군 진지에 마구 떨어집니다. 적의 공격입니다. 전차도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6·25 남침 이듬해인 1951년 김종필 육군본부 정보국 대위가 상황실에서 지시봉으로 괘도를 가리키며 적정을 브리핑하고 있다. 맨 위에 한자로 ‘적의 공격 징후’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JP는 1949년 6월부터 육본 정보국에서 일해 왔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6·25 남침 이듬해인 1951년 김종필 육군본부 정보국 대위가 상황실에서 지시봉으로 괘도를 가리키며 적정을 브리핑하고 있다. 맨 위에 한자로 ‘적의 공격 징후’라는 제목이 적혀 있다. JP는 1949년 6월부터 육본 정보국에서 일해 왔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육군본부 정보국의 수화기를 들자 의정부 제7사단 정보장교의 다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마른 침을 삼키며 마치 숨 넘어갈 듯 외치던 그 음성이 65년이 지난 지금도 내 귓가에 쟁쟁하다.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의 시작이었다.

나는 육군본부 정보국의 북한반장 중위였다. 토요일이던 6월 24일 나는 남한반 소속 서정순 중위 대신 당직 근무를 자원했다. 내가 줄곧 경계하고 걱정해 온 그날이 코앞에 닥쳐왔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6·25 남침 6개월 전인 1949년 12월 육본 정보국은 ‘연말종합적정(敵情)판단서’를 작성했다. 북한 남침 준비 상황을 소상히 파악해 아군의 대책을 건의한 방대한 보고서였다. 작성을 지시·주도한 건 정보국 작전정보실장이었던 박정희 문관(文官)이었다. 그는 그해 4월 숙군(肅軍)으로 강제 예편돼 문관으로 일하고 있었다(1년2개월 만인 50년 6월 30일 소령으로 복직).

그가 “여러 가지 걱정스러운 징후가 보이고 있다. 종합적인 적정보고서를 만들자”고 의견을 냈고, 나와 남한반장인 이영근 중위가 참여했다. 나는 북한의 군사 정보를, 이영근 중위는 남한에 침투한 무장공비 현황을 분석하고 박정희 문관이 종합 판단을 했다. 이 판단서는 전란(戰亂) 중 소실됐지만 그 내용은 내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 요점을 옮기자면 이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