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령 박정희 “선 오브 비치”…美장교 면전에 쌍욕한 사연 (110)

  • 카드 발행 일시2024.04.1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이 다음 주 최종회를 앞두고 있습니다. JP의 인생은 박정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얽힘의 관계였습니다. 마지막 회를 앞두고 김종필과 박정희가 함께 겪은 북한과 미국을 소개합니다. 역사를 ‘교과서’식으로만 요약해 외우면 그 시대를 직접 겪고 헤쳐간 이들의 심성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이번 회엔 말년에 극도의 불화를 겪었던 미국에 대한 박정희의 인식을 JP의 회고를 통해 살펴봅니다. 박정희가 대령 시절 미군 장교에게 ‘쌍욕’을 날린 일화도 소개합니다.

1979년 7월 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영애 박근혜(전 대통령)가 한국을 떠나는 카터 대통령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 왼쪽 둘째는 딸 에이미. 박 대통령은 2박3일 일정으로 방한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공박을 벌였다. 중앙포토

1979년 7월 1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영애 박근혜(전 대통령)가 한국을 떠나는 카터 대통령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은 카터 대통령의 부인 로절린 여사, 왼쪽 둘째는 딸 에이미. 박 대통령은 2박3일 일정으로 방한한 카터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놓고 공박을 벌였다. 중앙포토

1970년대 미국 하원의 국제기구소위원회를 이끌던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은 한국의 민주화 후퇴, 인권탄압을 들먹이며 압박을 가했다. 75년 4월 국무총리였던 나는 방한한 그와 만났다. 프레이저는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 공세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민주주의를 필리핀과 파키스탄에서 좀 배우라”고 큰소리쳤다.

내가 “필리핀이 민주주의 선진국이냐”고 따지자 그는 “한국보다는 선진화돼 있다”고 했다. 그의 말에 강대국의 독선과 우월감, 민주주의에 대한 허위의식이 넘쳐났다. 나는 지지 않고 받아쳤다. “민주주의를 그 따위로 해석하는 당신 같은 사람이 미국의 이미지를 훼손하고 있소. 민주주의를 지탱할 경제력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한단 말이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탱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소.” ‘선(先) 산업화-후(後) 민주화’의 내 논리에도 프레이저는 주장을 꺾지 않았다.

나는 “누가 옳은 길을 걷는지 알아차리는 날이 올 거요”라고 소리쳤다. 일본으로 건너간 프레이저는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한국에서 JP를 만나서 기합만 받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고 한다. “왜 거기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느냐”는 일본 의원의 질문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와의 면담에서 그는 무항산(無恒産) 무항심(無恒心)이란 국가 발전의 이치를 느꼈을 것이다.

강화도 광성보에 있는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1977년 10월 강화 전적지를 둘러본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듬해 건립됐다. 중앙포토

강화도 광성보에 있는 신미양요 순국 무명용사비. 1977년 10월 강화 전적지를 둘러본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이듬해 건립됐다. 중앙포토

미국과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중압감을 주는 결정적인 문제가 주한미군 철수였다. 69년 7월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그 발표를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일종의 폭탄선언이었다. “아시아 국가는 대미 의존을 버리고 스스로 집단안보 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듬해 미국 국방부는 주한미군 일부 철수 계획을 수립해 71년 3월 7사단 병력 2만 명을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박 대통령은 내심 크게 당황했다. 북한 김일성이 환갑잔치를 서울에서 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비상 시국이었다. 역사는 불가측(不可測)의 측면을 열어놓고 있다. 세계 정세의 변용기(變容期)에 영지(英智)와 노력을 모아 현명한 선택을 해야 했다.

그때부터 박 대통령은 “싸우면서 건설하고 건설하면서 싸우자”는 구호를 내걸고 자주국방 태세 확립에 주력했다. 그는 “북한이 전쟁을 도발한다면 수도 서울에서 절대로 철수하지 않고 전 시민과 함께 대통령도 남아 사수할 것”(75년 4월 안보강화 특별담화)이라고 결의를 나타냈다. 나 역시 “전쟁이 나면 최전선의 대대장으로 나서서 싸우겠다”며 호국 의지를 고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