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백두대간 최초 종주…‘뉴질랜드 셰퍼드’는 왜 지리산 살까

  • 카드 발행 일시2024.03.19

“사회적 제약과 통념을 뛰어넘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것을 위해 단련하는 것. 그것에 도달하긴 어렵지만, 그것을 위해 노력하는 삶이 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유년 시절엔 마냥 행복했지만, 어른이 되면서 멋진 집,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좇습니다. 어른이 되면서 순수함과 꿈을 잃어버리고, 사회적 통념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죠. 그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하나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그것은 자유(freedom)에 대한 갈구입니다. 끊임없이 자유를 찾아 여행하는 것이죠. 물론 돈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나를 추스를 수 있는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

10여 년 전부터 전남 구례면 산동면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뉴질랜드 트레커 로저 셰퍼드(58)가 말했다. 그는 2006년 휴가차 방문한 한국의 산하에 빠져 2007년 70일 동안 백두대간을 일시 종주하고, 2010년 『Baekdu Daegan Trail(백두대간 트레일)』 책을 냈다. 외국인이 쓴 최초의 영문판 백두대간 트레킹 가이드 북이다. 내친김에 북한의 산하를 돌아본 후, 이후 ‘백두대간’을 주제로 남과 북에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그는 이웃집 할머니들이 준 김치를 넙죽넙죽 받아먹고, 달지 않는 쌀막걸리를 즐기는 친한파다. 주민들과 대화할 때는 절반은 한국말이다. “농협은 너무 비싸” “꼰대 같다” 등이다.

2019년 백두산 정상 장군봉에 오른 로저 셰퍼드. 그는 외국인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영문판 가이드북을 냈다. 사진 로저 셰퍼드

2019년 백두산 정상 장군봉에 오른 로저 셰퍼드. 그는 외국인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영문판 가이드북을 냈다. 사진 로저 셰퍼드

지난 14일, 로저와 함께 지리산둘레길 3코스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서 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마을까지 13㎞를 걸었다. 3코스는 본래는 남원 인월에서 시작해 금계마을까지지만, 중간쯤인 산내면에서 시작했다. 그는 지리산둘레길을 거의 다 가봤지만, 이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그는 “기왕이면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 모르는 길에 처음 들어섰을 때 설렘이 좋다”고 했다. 또 “사람들은 간혹 ‘어느 길이 가장 좋냐’고 묻지만, 나에게 가장 좋은 길이란 없다. 새로운 길이 좋은 길”이라고 했다.
대정리에서 시작하는 3코스는 지리산 주 능선을 오른쪽에 끼고 걷는다. 마을 언덕에서 멀리 지리산 반야봉(1732m)이 보였다. 그는 걷는 것만큼이나 이야기를 좋아했다. 트레일 시작할 때엔 5분에 한 번씩 멈춰 얘기하느라 13㎞를 가는데, 8시간이나 걸렸다.

길 위에서 인생의 길을 찾는 ‘방랑자’

지리산둘레길 3코스에서 한국의 산에 대해 얘기하는 로저 셰퍼드. 김영주 기자

지리산둘레길 3코스에서 한국의 산에 대해 얘기하는 로저 셰퍼드. 김영주 기자

구례 산동은 그의 인생에서 네 번째 정착지다. 그는 고교 시절 자동차 도장공 일을 배웠지만, 견습 과정을 마치기 전 학교를 그만뒀다.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가 자동차 도장공 일을 1년 정도 했다. 그곳에서 일하며 유럽을 여행하던 중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무작정 아프리카로 떠났다. 스무살 시절의 일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시작해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했어요. 일부러 차를 타지 않고 히치하이킹으로 이동했죠. 나름대로 탐험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모잠비크, 잠비아, 탄자니아, 케냐 등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갔죠. 대륙 종단을 마치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한참을 생각했어요. 그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난 국립공원 레인저가 생각나더군요. 여행 중 만난 사람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그를 찾아가 ‘월급을 안 줘도 되니 일을 달라’고 했어요. 열심히 했더니 인정받게 돼, 나도 레인저가 됐습니다. 이후 모잠비크, 잠비아 등을 돌며 8년 동안 아프리카 국립공원 레인저로 일했어요. AK47 총을 들고 사파리 투어 손님을 보호하거나 상아를 도둑질하는 밀렵꾼을 쫓는 일이었죠. 차를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걸어다녔어요. 8년의 여정이 내 인생의 향로를 결정지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마냥 운동을 좋아하는 개구쟁이 소년이었는데, 아프리카 대륙을 돌며 레인저 일을 할 때 ‘아, 이런 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구나’ 깨달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