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에 홀린 줄 알았다” 산속 리본이 고마운 순간 [백두대간을 걷다⑥]

  • 카드 발행 일시2024.02.13

백두대간을 걷다⑥-추풍령 권역

호모 트레커스가 1월 1일부터 약 50일간 ‘백두대간을 걷다’ 종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강원도 고성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 마루금(능선) 700㎞를 직접 밟아 백두대간의 겨울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보전해야 할 동식물 이야기 등을 전합니다. 다섯 번째 구간은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추풍령 권역입니다. 지난 1일부터 4일까지 경북 상주 큰재에서 경남 거창 신풍령까지 약 80㎞를 걸었습니다. 지난해 12월 31일 길을 나선 이후 35일째, 전체 구간 중 4분의 3을 지났습니다.

지난 1일 큰재(300m, 경북 상주)에서 다시 길을 나섰다. 큰재엔 백두대간 생태교육장이 있는데, 겨울엔 모든 시설이 폐쇄된다. 대간 마루금(능선)을 지나며 여러 곳의 교육장을 지나쳤는데, 겨울에 문을 연 곳이 한 곳도 없었다. 생태교육장을 등지고 앞을 보면 웅이산(795m)이 버티고 있다. 이날 넘어야 할 첫 관문이다. 중국의 웅이산과 닮아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하는데, 정상은 국수봉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눈 녹은 길을 경쾌하게 걷고 있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눈 녹은 길을 경쾌하게 걷고 있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큰재에서 웅이산까진 거의 낙엽길이다. 눈이 안 내린 건지 다 녹은 건지 몰라도 앞서 속리산 권역과는 딴판이었다. 정상에 다다를 때까지도 눈이 없었다. 이후 이어지는 용문산(708m)·무좌골산(474m)도 비슷하다. 수북이 낙엽 쌓인 길이다. 대간 능선은 무좌골산에서 작점고개(340m)를 지나 난함산(733m) 아래로 서쪽으로 이어진다.

작점고개 초입에 들어섰을 때 코를 찌르는 악취가 진동했다. 능선 바로 아래에 시커먼 똥물을 뿜어내는 커다란 탱크가 4개 있었다. 차로 싣고 온 똥물이 탱크마다 채워지고 있었다. 주변엔 돈사와 축사 등이 즐비했는데, 이곳에서 나오는 분뇨를 모아 처리하는 시설이다. 축사가 있으니 분뇨를 처리하는 곳이 있어야 할 터이지만, 가림막이나 냄새를 제거할 만한 어떤 시설도 없이 백두대간 능선에 노출돼 있었다.

고약한 냄새는 고개 너머 난함산 아래까지 이어졌다. 이날은 희뿌연 안개가 시종일관 가시지 않을 정도였는데, 그래서인지 악취가 계속 따라다녔다. 머리가 지끈할 정도였다. 약 1시간 동안 악취가 나는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백두대간 700㎞ 구간 중 최악의 구간이었다.

악취가 진동하는 낙엽길은 도망치듯 내려오니, 경부고속도로 추풍령휴게소가 보였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긴 후 첫 번째 휴게소라고 한다. 대간 능선은 추풍령면 추풍리를 지나는데, 마을 앞에 기념탑과 추풍령 노래비가 있었다.

충북 영동군 추풍리에 있는 '추풍령' 노래비. 김영주 기자

충북 영동군 추풍리에 있는 '추풍령' 노래비. 김영주 기자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고 남상규가 부른 ‘추풍령’의 가사다. 노래에서 공감되는 가사는 “그 모습 흐렸구나” 뿐이다. 이날은 추풍령은 온종일 안개가 자욱했다. 1965년, 이 노래가 나올 당시만 해도 추풍령은 심심산골 고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경부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접근하기 쉬운 고갯길이 됐다.

노래비 앞 잔디밭에 등산화 끈을 풀고, 핸드폰 앱을 켜서 이 노래를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다. 이날 큰재~추풍령 약 19㎞를 8시간에 걸쳐 걸었는데, 이렇게 망중한을 즐겼다. 재킷 안에서 시큼한 땀 냄새가 나고, 양말에선 고린내가 나더라도 상관없다. 길바닥에서 즐기는 잠깐의 여유가 좋다. 이날 휴게소 인근에서 야영했다.

눈과 얼음으로 갈증을 달래다  

지난 2일 새벽, 경북 김천 눌의산 정상부에서 내려다본 경부고속도로와 추풍령 휴게소. 김영주 기자

지난 2일 새벽, 경북 김천 눌의산 정상부에서 내려다본 경부고속도로와 추풍령 휴게소. 김영주 기자

이튿날인 지난 2일은 추풍령휴게소를 굽어보는 눌의산(743m)을 오르는 것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전날처럼 낙엽 쌓인 길이 이어졌고, 정상에도 눈이 많지 않았다. 눌의산이라는 이름이 궁금증을 자아냈는데, 눌의는 ‘눌하다’ 또는 ‘더디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추풍령을 사이에 두고 충청도와 경상도 지역 양쪽 교류가 많지 않은 탓에 붙여진 이름이다.

충북 영동군 궤방령. 김영주 기자

충북 영동군 궤방령. 김영주 기자

눌의산을 내려오면 괘방령(掛榜嶺·300m)이다.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잇는 고갯길로 영동군은 이 길을 ‘장원급제길’이라 이름 붙였다. 조선 시대 일부러 이 고개를 넘어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괘방령은 관에서 방을 붙이던 곳인데, 그래서 이곳을 넘어가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희망을 담고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반면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고 해서 기피했다고 한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설을 지자체에서 스토리셀링한 것이다.

궤방령엔 백두대간을 하는 산꾼 사이에서 꽤 유명한 궤방령산장이 자리 잡고 있다. 숙박과 식사가 가능하다. 단, 예약해야 한다. 산장의 주인장은 “손님이 많지 않아 재료를 미리 준비해 놓지 않기 때문에 하루 전에 예약해야만 식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취재팀은 예약 전화를 하지 않았다. 주인장은 대신 초코파이 5개를 일행에 건네줬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웠다.

충북 영동군 궤방령산장. 김영주 기자

충북 영동군 궤방령산장. 김영주 기자

궤방령 이후부턴 물을 구할 곳이 없어 이곳에서 물을 지고 가야만 했다. 산장에서 2L 생수 한 병을 배낭에 넣었다. 야영지엔 우두령(720m, 경북 김천)까지는 12.5㎞. 꼬박 6시간을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