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들도 “땅에 대변 묻어라”…난 배낭에 넣고 다닌 이유 [백두대간을 걷다⑤]

  • 카드 발행 일시2024.02.06

백두대간을 걷다⑤ 속리산 권역

호모 트레커스가 1월 1일부터 약 50일간 ‘백두대간을 걷다’ 종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강원도 고성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 마루금(능선) 700㎞를 직접 밟아 백두대간의 겨울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보전해야 할 동식물 이야기 등을 전합니다. 다섯 번째 구간은 속리산국립공원 권역입니다. 지난 26일부터 30일까지 5일 동안 이화령(경북 문경)에서 큰재(상주)까지 102㎞를 걸었습니다.

‘백두대간 700㎞를 걷다’ 시작 후 한 달간 약 470㎞를 걸었다. 앞으로 남아 있는 길은 240여㎞. 3분의 2를 지났다. 올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지만, 지금까지 무난하게 헤쳐왔다. 설악산·오대산·태백산 등 고산 지 대에 큰 눈이 내린 시기를 잘 피해왔고, 김미곤(52)·이억만(62) 대장과 기자 세 명의 호흡도 잘 맞았다.
대간 능선은 속리산국립공원을 지나면서 온순해졌다. 해발 고도가 200m대까지 떨어지는 ‘비산비야(非山非野, 산도 평야도 아닌 땅)’가 사흘가량 이어졌다. 한 달 가까이 험한 길을 걷다 평탄한 길에 접어드니, 머릿속 에 생각이 많아졌다. ‘나는 왜 걷는가’ 실존적 질문이 밀려왔다. 하루 10시간 길을 걸으면서 내내 질문을 던졌다.

지난달 26일, 다시 이화령에 섰다. 문경과 충북 괴산을 남북으로 잇는 고개다. 오전 7시, 둥근 보름달이 이화령 아래 은티마을 서쪽에 걸려 있었다. 동시에 동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고갯마루에 서서 서쪽 하늘에 걸린 보름달과 동쪽에서 올라오는 여명을 보며 트레킹을 시작했다.  고갯마루엔 작은 휴게소가 있는데,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기온은 여전히 영하 10도 근방이었다.

1월 26일 백두대간 희양산(경북 문경) 삼거리에서 은티재로 오는 길, 암릉 구간을 로프에 의지해 내려오는 김미곤(가운데) 대장과 이억만 대장. 김영주 기자

1월 26일 백두대간 희양산(경북 문경) 삼거리에서 은티재로 오는 길, 암릉 구간을 로프에 의지해 내려오는 김미곤(가운데) 대장과 이억만 대장. 김영주 기자

이날 길은 멀고 험했다. 이화령을 출발해 1000m 안팎의 봉우리를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다. 황학산(912m)·백화산(1063m)·이만봉(990m)·희양산(999m)·구왕봉(879m)·악휘봉(845m) 등이다. 강원도의 산에 비해선 높지 않은 봉우리지만 칼날 능선과 암릉 구간을 통과해야 해 집중력이 필요했다. 특히 희양산에서 은티재 방향으로 내려오는 구간은 수십m의 직벽을 밧줄(로프) 하나에 의지해 내려와야 했다. 아무런 확보 장치 없이 한 가닥 로프에 의지해 하강하는 일은 위험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바위 표면과 로프가  바짝 얼어 있어 더 위험했다. 얼어붙은 로프가 손에서 미끄러지지 않도록 손아귀와 팔뚝에 있는 힘을 다 몰아넣어야 했다. 행여 실수해 굴러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크게 다칠 수 있는 구간이다. 그나마 암릉 아래가 낭떠러지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구왕봉에 섰을 때 은티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한눈에 보였다. 900~1000m의 봉우리들이 은티마을을 감싸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화령에서 출발해 구왕봉에 이르기까 지, 은티마을을 가운데에 두고 십여 개의 산봉우리가 시계 방향으로 빙 둘러싼 형국이다.

백두대간을 걸어오면서 『정감록』에 등장하는 ‘십승지’(난을 피해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은거지)를 여러 곳 거쳤는데, 은티마을이야말로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산 아래서 내려다보니 확연히 보였다. 특히 은티마을 동쪽 분지리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분지안말은 정말로 은거할 만한 동네였다. 나중에 꼭 한 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오지였다.

1월 26일, 백두대간 악휘봉(경북 문경)을 오르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1월 26일, 백두대간 악휘봉(경북 문경)을 오르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대간 종주는 악휘봉에서 더는 똑바로 나아갈 수 없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장성봉(915m)·대야산(931m)까지 약 14㎞ 구간이 출입금지(비법정 탐방로) 구간이기 때문이다. 악휘봉까지 간 다음 산에서 내려와 차량을 이용해 대야산으로 가야 한다. 악휘봉 ‘출입금지’ 이정표를 확인하고 다시 은티재로 내려오니 오후 6시30분. 오전 7시 이화령에서 시작해 23㎞를 꼬박 11시간30분 걸었다. 배낭 안엔 먹을 것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고, 각자의 물통도 모두 비 웠다. 배고픔은 일상이 됐지만 갈증에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한겨울이지만 수많은 봉우리를 넘느라 땀을 잔뜩 흘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은티재에서 은티마을까지 2㎞를 내려가는 것뿐이다.

랜턴 불빛에 의지해 악휘봉에서 하산 중인 김미곤(왼쪽) 대장과 이억만 대장. 이날 하루 12시간, 25km를 걸었다. 김영주 기자

랜턴 불빛에 의지해 악휘봉에서 하산 중인 김미곤(왼쪽) 대장과 이억만 대장. 이날 하루 12시간, 25km를 걸었다. 김영주 기자

랜턴 불빛에 의지해 마을로 내려오는 길, 등산로 옆으로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콸콸 흘렀다. 생명수를 만난 기분이었다. 김미곤 대장이 먼저 배낭을 멘 채로 엎드려 목을 길게 빼고 계곡물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목마른 말이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이억만 대장과 기자도 계곡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온종일 물 1L에 의지해 12시간을 걷다가 만난   꿀맛이었다. 물에서 나뭇잎 삭은 맛이 나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이날 괴산군 연풍면 개인택시를 불러 연풍면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