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 만류에도 귀국한 아키노, 트랩서 피 흘리며 떨어졌다 (85)

  • 카드 발행 일시2024.02.05

1983~86년 나는 오랜 기간 미국에서 머물며 지냈다. 망명 아닌 망명 생활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정치활동 규제자로 묶었기 때문에 국내에선 옴짝달싹할 수가 없던 시기였다. 나는 조용히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83년 4월 나는 미국 컬럼비아대의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두 달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의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면서 수요일마다 한 시간씩 후진국의 근대화에 대해 강의했다. 극빈에 처한 나라가 어떻게 하면 조금씩 근대국가로 변모해 갈 수 있는지 내 체험을 전하고 가르쳤다. 6월 말부터는 워싱턴·뉴욕·보스턴 등지를 다니며 미국 정계 인사와 교포·친지들을 만났다. 그중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있다. 베니그노 아키노와의 마지막 만남이다.

1986년 2월 25일 김포공항에서 김종필(JP) 전 공화당 총재와 부인 박영옥 여사가 환영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했던 JP는 이날 1년7개월 만에 귀국했다. 양정규·최치환 국민당의원(JP 오른쪽 뒤 첫째·둘째)을 포함한 옛 공화당 출신 인사 300여 명이 공항에서 그를 맞이했다. JP는 곧장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가서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했다. 귀국 전 JP는 전두환 대통령 측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귀국 시기를 늦춰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86년 2월 25일 김포공항에서 김종필(JP) 전 공화당 총재와 부인 박영옥 여사가 환영객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미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했던 JP는 이날 1년7개월 만에 귀국했다. 양정규·최치환 국민당의원(JP 오른쪽 뒤 첫째·둘째)을 포함한 옛 공화당 출신 인사 300여 명이 공항에서 그를 맞이했다. JP는 곧장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가서 박정희·이승만 전 대통령 묘소에 참배했다. 귀국 전 JP는 전두환 대통령 측이 보낸 사람으로부터 “귀국 시기를 늦춰 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 인물 소사전: 베니그노 아키노(1932~83)

필리핀 정치 사상 최연소 시장·부지사·상원의원에 선출된 야당 지도자. 1973년 대선을 앞두고 마르코스 대통령의 대항마로 떠올랐지만 72년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체포돼 8년간 구금 상태에 있었다. 77년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80년 심장병 치료를 이유로 일시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반마르코스 운동을 하다가 83년 8월 21일 마닐라공항 귀국 직후 괴한에 의해 피살됐다. 아키노 암살사건은 대규모 반정부 운동을 촉발시켜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뜨렸다. 아내 코라손 아키노가 86년 대통령에 당선(재임 1987~1993)됐고, 아들 베니그노 아키노 3세도 필리핀 대통령을 역임(2010~2016)했다.

필리핀 야당 지도자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은 두  번 방한한 적이 있어 나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는 마르코스 정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80년 5월 석방돼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 83년 8월 초 하버드대 동양학연구소의 브라운 교수가 주최한 특강에 나와 아키노가 함께 강사로 초청됐다. 강의가 끝난 후 아키노와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자리에서 아키노는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밝혔다. 84년으로 예정된 선거를 앞두고 민주화 투쟁을 위해 귀국하겠다는 것이었다.

아키노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가 뉴욕에 왔을 때 마르코스의 메시지를 받았다고 했다. 마르코스는 ‘귀국을 지원하겠다. 내 라이벌이 되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아키노는 “확신을 줄 만한 이야기였습니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말렸다. “아키노씨, 가면 안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패하고 권력만 탐하는 독재자들은 거짓말에 능합니다. 그들의 감언(甘言)을 믿지 마십시오. 아무래도 필리핀에 돌아가면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몇 번이나 간곡하게 만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