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추도식’ 방해한 전두환, 구미 출발 버스도 돌려보냈다 (86)

  • 카드 발행 일시2024.02.07

시대는 캔버스와 같다. 하얀 캔버스에 그림을 칠하듯 시대는 그려가는 것이다. 1980년에 맞이한 ‘서울의 봄’에 우리 국민은 불안 속에서도 자유와 민주의 새시대 그림을 그려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 희망의 캔버스는 신군부가 정권의 중심을 전횡하면서 송두리째 망가졌다.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나는 어언 6년의 고독하고 황량한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1987년 대선 80일을 남겨 놓고 9월 2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JP가 이튿날인 9월 29일 고향 충남 부여군 백마강변 구드레 광장에서 열린 정계 복귀 환영대회에 참석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모습. 이날 행사에는 충남 도민 등 10만여 명이 운집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김종필(JP) 전 총리는 1987년 대선 80일을 남겨 놓고 9월 28일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JP가 이튿날인 9월 29일 고향 충남 부여군 백마강변 구드레 광장에서 열린 정계 복귀 환영대회에 참석해 두 손을 번쩍 들고 있는 모습. 이날 행사에는 충남 도민 등 10만여 명이 운집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86년 가을 나는 ‘박정희 대통령 7주기 추도식’을 준비했다. 박 대통령의 추도식은 그 전에도 몇 번 시도됐으나 전두환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84년엔 전예용·장영순·구자춘·이병희씨 등 5·16혁명 동지들로 구성된 민족중흥동지회가, 85년엔 정일권씨가 중심이 돼 추도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정치적 불안 요소로 비화할 것을 우려한 5공 정권이 견제하는 바람에 무산되거나 위축됐다.

내가 영구 귀국한 이상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을 기리는 추도행사는 세상 앞에서 당당하게 치러져야 했다. 행사 일주일 전쯤 내가 7주기 추도식 추도위원장을 하고, 최규하 전 대통령이 추도위 고문을 맡는다는 발표를 했다. 전국 2500여 명의 추도위원에게 안내장을 발송하고 일간신문 광고를 통해 박 대통령 추도식을 10월 26일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즈음 나를 늘 쫓아다니면서 으르고 위협하던 이가 있었는데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이었다. 안기부는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수장(김재규)이 대통령을 시해했다고 기관 명칭까지 바꾼 조직인데 정치에 개입하고 민간인을 협박하는 일은 여전했다. 하루는 장세동이 나를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 있는 안기부장이 전용으로 쓰는 방으로 불렀다. 그들은 그 방을 안가(安家)라고 했다.

🔎인물 소사전: 장세동(1936~)

5공 시절 청와대 경호실장과 안기부장을 차례로 지낸 전두환 대통령의 최측근 실력자. 육사 16기로 전남 고흥 출신이다.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멤버였고 월남전에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1979년 12·12에 참여한 핵심 인물로, 경복궁 안에 있던 그의 수경사 30경비단장(대령) 사무실은 신군부의 지휘소로 사용됐다. 85년 안기부장에 올라 전 대통령의 정권 관리를 맡았으며 노태우 민정당 대표, 노신영 국무총리와 함께 한때 여권의 후계자군으로 부상했다. 87년 5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조작사건’이 불거지면서 경질됐다. 12·12특별법 등에 의해 김영삼 대통령 시절 4년간 수감됐다.

장세동은 “총재님이 하려는 추도식을 중지해 주십시오. 정치를 다시 시작하려는 모양인데 그건 안 됩니다. 그걸 하면 아주 어려운 상황에 부닥칠 것입니다”고 협박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 내일이 보이나?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당신한테 이롭다. 내가 이 순간을 기억해 두마. 세상 무슨 짓을 해도 추도식을 중지시킬 순 없다. 나는 더 무서운 짓도 한 사람이다. 당신이나 조심해라.” 박정희 대통령의 품에서 자랐던 저들이 추모행사마저 못하게 하는 행태에 울분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