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폰 잃어버렸어”“뚝”…약 올린 설산, 야속한 아내 [백두대간을 걷다③]

  • 카드 발행 일시2024.01.23

백두대간을 걷다③ 태권산 권역

호모 트레커스가 1월 1일부터 약 50일간 ‘백두대간을 걷다’ 종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강원도 고성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 마루금(능선) 700㎞를 직접 밟아 백두대간의 겨울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보전해야 할 동식물 이야기 등을 전합니다. 세 번째 구간은 태백산국립공원 권역입니다. 지난 14일부터 18일까지 5일 동안 백봉령(강원 동해)에서 도래기재(경북 봉화)까지 약 100㎞를 걸었습니다.

‘백두대간 700㎞ 걷다’ 3주째,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푹푹 빠지는 눈길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하루 약 23㎞를 걷을 수 있게 됐다. 걷기 앱에 표시된 걸음으로 치면 약 4만5000보(트랭글 기준) 가량이다. 몸이 가벼워지자 덩달아 마음도 가벼워졌다. 이제 ‘끝까지 마칠 수 있을까’라는 근심 걱정은 하지 않게 됐다.

지난 16일 오전, 금대봉 오르는 길. 러셀을 해야만 했다. 사진 김미곤

지난 16일 오전, 금대봉 오르는 길. 러셀을 해야만 했다. 사진 김미곤

백두대간 마루금이 동해에서 태백으로 접어드는 구간은 명산(名山)이 즐비하다. 발우 두 개를 엎어놓은 것 같은 청옥산(1403m)과 두타산(1355m), 탄광 갱도에 남편을 보낸 아녀자들이 무사안일을 빌기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는 함백산(1572m). 그리고 왕이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낸 태백산(1567m) 천제단 등을 지난다. 또 이 구간은 진부령에서 동해를 따라 정남으로 흐르던 마루금이 내륙으로 용틀임하는 곳이다. 능선에 서면 강원 영동과 내륙의 차이가 또렷하다. 동쪽은 낙엽이 수북이 쌓였지만 서쪽은 눈이 가득하고, 동쪽에 비가 올 때 내륙엔 눈이 펑펑 오는 식이다.

1월 17일, 강원도 태백 은대봉에서 본 '바람의 언덕'과 매봉 능선. 사진 김미곤

1월 17일, 강원도 태백 은대봉에서 본 '바람의 언덕'과 매봉 능선. 사진 김미곤

지난 14일, 동해 백봉령(780m)에서 백두대간 종주 3주 차를 시작했다. 마루금은 원방재(730m)·이기령(810m)을 넘어 갈미봉(1260m)·고적대(1353m)로 이어진다. 그리고 청옥산·두타산을 지나 댓재(810m)까지 27㎞. 꽤 긴 거리지만, 백두대간 종주를 구간별로 나눠 걷는 이들은 하루 만에 마치기도 한다. 중간에 식수를 구할 곳이 없고, 탈출로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재팀은 무리라고 생각해 중간에 야영하기로 했다.

힘든 오르막 구간은 없었지만, 겨울 산은 역시 만만치 않았다. 끄물끄물한 날씨는 오후가 되자 진눈깨비를 뿌리기 시작하더니, 오후 1시를 기해 굵은 눈으로 바뀌었다. 집이나 카페에서 이런 눈을 맞는다면 한갓지게 구경하겠지만, 고립무원의 능선에서 뺨을 때리는 굵은 눈은 사람을 겁나게 한다. 기상청 예보가 빗나갔다는 게 더 불안했다. 이날 예상 적설량은 “1㎝가량”이었지만, 능선엔 벌써 5㎝ 이상 신설이 쌓였다. 예보가 어느 정도 더 빗나갈지 몰라 마음이 더 조급했고, 서둘렀다.

칼바람 맞고 야간 산행

불안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결국 문제가 생겼다. 걷다 보니 배낭 어깨끈에 달린 케이스에 넣어둔 휴대폰이 빠지고 없었다. 백봉령에서 남쪽으로 15㎞ 지점, 갈미봉(1260m) 근처에서다. 사진과 영상을 남기기 위해 수시로 넣다 뺐다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케이스 지퍼를 닫는 걸 깜박한 모양이다. 난감했다. 무게를 줄이느라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아 휴대폰이 없다면 기록을 못 하게 된다. 또 고립무원의 산에서 휴대폰은 생존과도 직결된다.

오후 3시쯤, 이날의 야영지를 찾아야 할 시간이지만 휴대폰을 찾기 위해 오던 길을 다시 더듬어 갔다. 그러나 애초 발목에서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에 신설까지 내린 상황에서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는다는 건 가망 없는 일이었다. 거의 1시간 반가량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 포기하고 이제 야영지를 찾아야 했다.

휴대폰 분실로 전체 걷기 일정도 어그러졌다. 일정상 14~16일 사흘 동안 60㎞를 가야만 했기에 이날 하루 20㎞를 가야 했다. 그러나 이날 거리는 17㎞에 그쳤다. 그것도 랜턴을 켜고 오후 6시 30분까지 운행한 결과다. 이번 대간 종주에서 야간 산행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산에서 사고는 이럴 때 생긴다. 뭔가 한 가지 일이 틀어졌을 경우 또 다른 실수를 하게 되고, 어이없는 실수가 겹쳐 비운을 맞게 되는 식이다. 일행을 이끄는 김미곤(52) 대장은 침착했다. 야간 산행을 해서라도 눈보라와 바람이 피할 수 있는 야영지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고,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다행히 고적대 정상 넘어 연칠성령(1204m) 안부에 안전한 사이트를 마련했다.

세 명 모두 기진하다시피 해서 겨우 텐트를 쳤다. 이틀 동안 남은 알파미(수분을 완전히 뺀 건조 밥)가 4개였으므로, 이날 저녁은 알파미 2개로 셋이서 나눠 먹었다. 다행히 동해에서 하루 쉬는 동안 가져온 돼지고기 수육이 있어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다. 허기를 해결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개통한 서울의 통신사 대리점에서 휴대폰을 하나 더 마련해 택배로 부쳐달라고 할 요량이었다.

평소처럼 “자기야 나야. 오다가 눈밭에 휴대폰을 잃어버렸어. 다시 해야 할 것 같아”라고 몇 마디 하는 순간, 아내는 “당신 목소리는 내 남편 목소리가 아니다. 안 속는다”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칼바람에 온종일 콧물을 흘린 탓에 코맹맹이 소리가 났나 보다. 그래도 휴대폰을 잃어버려 난감해하던 차에 아내가 내 목소리를 몰라보고 전화를 끊어버리자 상실감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출발 전 김미곤 대장의 휴대폰 번호를 미리 알려주지 않은 내 잘못도 있지만, 남편의 목소리를 몰라보고 ‘보이스피싱범’으로 오해하다니. 기분이 상해 다시 전화도 하지 않았다.

1월 14일 연칠성령 야영지. 늦은 시간에 텐트를 쳤다. 사진 김미곤

1월 14일 연칠성령 야영지. 늦은 시간에 텐트를 쳤다. 사진 김미곤

이날 밤 내내 뒤척였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2인용 텐트에서 세 명이 생활하느라 애초에 잠자리가 불편했는데, 이날은 휴대폰 분실에, 야속한 아내의 태도에 골이 나 더 잠이 오지 않았다. 꿈자리까지 뒤숭숭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튿날 텐트 밖으로 나와 보니 축축한 눈을 맞은 텐트는 축 처지고, 안은 결로가 생겨 물이 줄줄 흘렀다. 서둘러 젖은 침낭과 텐트를 개고,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남쪽 청옥산·두타산 방향으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