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돌 병풍 둘렀던 자병산, 해부당한 듯 오장육부 뜯겼다 [백두대간을 걷다 ②]

  • 카드 발행 일시2024.01.16

백두대간을 걷다② 오대산 권역

호모 트레커스가 1월 1일부터 약 50일간 ‘백두대간을 걷다’ 종주기를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강원도 고성 진부령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 마루금(능선) 700㎞를 직접 밟아 백두대간의 겨울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그리고 보전해야 할 동식물 이야기 등을 전합니다. 두 번째 구간은 오대산국립공원 권역입니다.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구룡령(강원 인제)에서 백봉령(동해)까지 약 100㎞(출입금지 14㎞ 구간 우회)를 걸었습니다. 대간 능선을 걷던 중 3일 연속 고라니를 만났습니다. 반면에 계속 잘려 나가는 백두대간의 ‘아픈 손가락’, 자병산(776m)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백두대간에 든 지 2주일, 해가 뜨면 걷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일이 일상이 됐다. 서울은 따뜻한 겨울이 이어지고 있다는데, 대간 능선에 부는 바람은 얼음칼처럼 차갑고 매섭다. 이젠 휘파람 소리를 내는 칼바람에 익숙해져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좋다. 술·커피·인스턴트·가공식품과 자연스럽게 단절했고, 적게 먹고 많이 걷는 게 루틴이 됐다. 배 속은 연신 꼬르륵꼬르륵 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간 쌓인 찌꺼기가 비워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

1월 11일,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잣나무채종원 뒤편 백두대간 능선을 걷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1월 11일,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잣나무채종원 뒤편 백두대간 능선을 걷는 김미곤 대장. 김영주 기자

이제 러셀(눈을 헤치고 길을 내는 작업)을 하면서도 하루 20㎞를 나아갈 수 있는 체력과 로테이션 시스템이 구축됐다. 김미곤(52) 대장과 이억만 대장, 기자 셋이 돌아가면서 하는 러셀은 이전보다 훨씬 탄력이 붙었다. 그래도 하루에 꼬박 9~10시간을 걸어야만 약 20㎞를 나아갈 수 있다. 12월 기준으로 수십 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는 적설량 때문이다. 거기에 지난 7~8일에도 강원도 산악 지역엔 5~20㎝가 더 내렸다. 러셀이 된 곳도 간밤에 거센 바람이 불고 나면 길은 사라져 버린다. 호모 트레커스 ‘백두대간을 걷다’ 취재팀은 이번 주에도 눈과 바람과 산짐승의 흔적을 쫓아 걸었다. ‘산에 들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위풍당당한 야생의 고라니 

1월 8일, 오대산 아래 노인봉에서 본 백두대간 능선. 김영주 기자

1월 8일, 오대산 아래 노인봉에서 본 백두대간 능선. 김영주 기자

산짐승의 발자국만 쫓다 실제 고라니와 마주했다. 지난 11일 강원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잣나무채종원 가기 전 백두대간 마루금(능선)에서다. 소싯적 고향에서 들판을 뛰어다니는 야생 고라니를 종종 본 적은 있지만, 첩첩산중에서 마주하긴 처음이었다.

고라니는 생각보다 몸집이 컸다. 몸무게가 30㎏은 족히 돼 보이는 성체 고라니는 아랫배가 불룩했다. 고라니의 번식기는 11~1월이라 하는데, 아마도 새끼를 밴 암컷으로 보였다. 능선을 올라오던 고라니는 능선을 내려가는 기자와 잠깐 눈을 마주쳤고, 이내 동쪽 사면을 향해 껑충 뛰어올랐다. 고라니는 놀라면 이렇게 토끼처럼 껑충껑충 뛴다고 한다. 핸드폰 카메라를 꺼낼 시간도 없이 수 초 만에 능선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한겨울을 이겨내는 야생의 고라니는 때깔부터 달랐다. 본래 등과 배가 노란색을 띤다는데, 이날 아침은 오전의 볕을 받아 금빛으로 빛났다. 로드킬을 당하는 비운의 짐승으로 알려졌지만, 야생에서 보니 위풍당당하고 맵시가 넘쳤다.

고라니는 능선에서 연한 나뭇가지를 찾고 있었을 것이다. 엄동설한 백두대간 능선에서 먹을 것이라곤 이것밖에 없다. 풀뿌리를 먹기도 한다는데, 어딜 가나 눈이 20~30㎝ 이상 쌓여 있어 풀을 찾을 순 없다. 배고픈 고라니는 이른 아침부터 먹이를 찾아 능선을 헤집고 다니던 중 갑자기 사람을 만나 바삐 도망을 간 것이다. 어느 날 아침보다 더 배고픈 아침이 됐을 것이다. 괜스레 미안해졌다.

앞서 김미곤(52) 대장은 이틀 연속 고라니를 봤다고 했다. 일행의 맨 앞에 갔기에 볼 수 있었다. 이날 아침은 기자가 앞장서 러셀을 했는데, 덕분에 행운을 만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겨울 백두대간 능선에서 고라니는 흔한 짐승일 것이다. 이 길은 인간보다 먼저 산짐승의 이동로라는 점이 더 확실해졌다.

1월 8일 백두대간 능선, 동대산 하산 길에 만난 산토끼의 배설물. 노란 경단처럼 생겼다. 김영주 기자.

1월 8일 백두대간 능선, 동대산 하산 길에 만난 산토끼의 배설물. 노란 경단처럼 생겼다. 김영주 기자.

앞서 지난 8일 오대산의 5봉 중 하나인 동대산(1433m)에서 내려오는 길엔 산토끼의 배설물이 등산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산에서 고라니와 멧돼지의 배설물은 흔하지만, 산토끼의 배설물을 보긴 힘들다.

강원도 산행 경험이 많은 이억만 대장은 “오랜만에 등산로에서 산토끼 똥을 본다. 요즘은 들개나 들고양이들이 산토끼를 위협해 더 보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산토끼의 배설물은 쇠똥구리가 말아 놓은 경단처럼 청심환 크기로 두세 알이 떨궈져 있었다. 이 대장이 말하지 않았다면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로 착각했을 정도다.

산토끼의 배설물은 모양새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마도 이날 아침 이곳에서 먹이 활동을 한 것으로 보였다. 또 산토끼가 배설한 곳 주변의 자잘한 나뭇가지는 낫으로 벤 듯 날카롭게 잘려 나갔다. 이 대장은 “토끼가 이빨로 잘라 먹은 자국”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산토끼의 똥이 나무색과 똑같았다.

중앙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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