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어젯밤에 죽을 뻔했시유” 최규하 겁에 질린 The Day (78)

  • 카드 발행 일시2024.01.19

1979년 10월 28일과 11월 6일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언론을 통해 국민 앞에 등장했다. 10·26 이튿날 비상계엄이 선포되면서 그는 계엄법에 따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의해 합동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 온 국민의 이목이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弑害) 사건’ 발표 내용에 집중됐다. 전투복 차림으로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전두환은 박 대통령 시해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단독 범행이라고 규정했다. 김재규가 10·26 저녁 박 대통령과의 만찬 때 시해 현장에서 50m 떨어진 별채에 정승화 참모총장이 있었다는 사실도 적시했지만 군부나 외세의 개입은 없었다고 했다.

1980년 3월 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오른쪽)이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가운데)에게 중장 진급 신고를 하고 있다. 왼쪽은 대장으로 진급한 백석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장 진급 한 달 뒤인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했고, 8월에는 대장으로 초고속 진급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80년 3월 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오른쪽)이 청와대에서 최규하 대통령(가운데)에게 중장 진급 신고를 하고 있다. 왼쪽은 대장으로 진급한 백석주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장 진급 한 달 뒤인 4월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했고, 8월에는 대장으로 초고속 진급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합수부 발표로 10·26사건 전말은 정리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국민들은 충격에서 벗어나 서서히 일상으로 돌아갔다. 정치권에서도 그동안 감돌았던 의문과 억측이 풀렸으며, 사회적 불안도 가시게 됐다고 대체로 평가했다. 그러나 “군부의 개입이 없었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군 내부에선 정승화 총장의 10·26 저녁 행적을 놓고 갈등과 대립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공화당 총재인 나한테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군부 내에서 이른바 정승화 총장의 군부와 전두환의 신군부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과 갈등이 번져가고 있다는 얘기였다. 같은 궁정동 울타리에 있던 정승화가 김재규의 저격 사실을 진짜 몰랐을까, 김재규와 차를 함께 타고 육본으로 이동한 뒤 그를 신속하게 체포하지 않은 데에 다른 이유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을 전두환 쪽에서 제기했기 때문이다. 계엄사령관으로서 정승화 총장의 장악력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정승화 총장은 수도경비사령관에 장태완 소장을 임명했다. 비육사 출신인 장태완(1950년 육군종합학교 졸업) 소장은 그와 경쟁관계였고 정치색이 짙었던 전두환을 싫어했다. 정승화가 자기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전두환을 견제하기 위해 장태완을 중용했다는 전두환 측의 불만이 공화당에도 들려왔다.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