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일을 섬에서 산 남자, 20년간 찾아낸 ‘섬길 100곳’

  • 카드 발행 일시2023.12.12

‘겨울에 걷기 좋은 섬길’ 글 싣는 순서

12월의 산은 싸늘하다. 그러나 남쪽 바다에 떠 있는 섬의 산들은 여전히 푸르다. 겨울에 걷기 좋은 섬길 3곳을 소개한다.

①한겨울 동백 터널, 통영 우도 둘레길  
②절해고도 섬길, 여수 초도 상산봉
③홍어 아니고 고래? 흑산도 칠락산길

강제윤(58) 섬연구소 소장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전국의 섬을 돌아다녔다. 일 년에 보통 150일을 섬에서 보냈다 하니, 지난 20년간 약 3000여 일을 섬에서 보낸 셈이다. 그 자체로 섬 나그네, 섬 트레커(trekker)다.

기자가 강 소장을 처음 만난 건 2003년 그의 고향인 전남 완도군 보길도의 부용리에서다. 고향집 인근에 ‘동천다려’라는 찻집을 하고 있을 때다. 차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잿빛 개량 한복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한 찻집 주인은 이제 갓 절에 든 학승 같아 보였다. 그때만 해도 30대 후반, 청년이었다.

지난 5일, 경남 통영의 한 다찌집에서 20년 만에 다시 만났다. 뿔테 안경과 나지막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나머지는 완연한 50대 후반 아저씨였다. 그는 통영 앞바다에 겨울에 걷기 좋은 섬길이 많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연도교로 붙어 있는 연화도·우도, 연대도·만지도, 추도 세 곳을 꼽았다. 모두 통영에서 남쪽으로 1시간 뱃길에 있다.

지난 6일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이 경남 통영시 우도의 동백터널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지난 6일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이 경남 통영시 우도의 동백터널을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우도는 동백나무 숲이 터널을 이룹니다. 또 포구 앞에서 바로 잡아서 내놓는 고등어회는 전국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맛이죠. 연대·만지도는 옛사람들이 지게 짊어지고 나무하러 다니던 지겟길을 걷기 길로 냈어요. 20여 가구가 사는 작은 섬 추도는 섬사람들과 조우할 기회가 많아요. 전수일 영화감독이 몇 해 전부터 거기에 집을 지어 살고 있고, 추도컬쳐클럽이라는 외지인을 위한 공간도 만들어서 민박도 해요. 또 매력 있는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하하.”

매력 있는 할머니들? “가보시면 압니다.” 그렇게 행선지를 정했다. 할머니들이 지키는 통영 앞바다 추도 숲길을 걸어보기로.

20년 발품 팔아 완성한 백섬백길 

우도 둘레길 초입, 전망대에 선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 김영주 기자

우도 둘레길 초입, 전망대에 선 강제윤 섬연구소 소장. 김영주 기자

사단법인 섬연구소는 지난해 ‘백섬백길’ 사이트를 열었다. 전국 수백 개 섬 중에서 걷기 좋은 길 위주로 100곳을 선정하고, 그와 관련한 정보를 망라했다. 강제윤 소장이 20년 동안 발품을 팔아 섬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공부한 결과물이다. 상업적인 요소를 배제한 홈페이지엔 100개 섬과 100개 걷기길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그러고 보니, 20년 전에 보길도 취재를 갔을 때도 그는 교과서에 없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산 윤선도(1587~1671년)가 말년을 보낸 보길도 산 중턱에 동천석실이라는 그림 같은 정자가 있었는데, 당시 그는 널리 알려진 설명 대신 “당시 53세였던 윤선도가 10대의 소실과 함께 보내던 정자”라고 했었다.

그는 12년 전부터 통영에서 작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다. 조선시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이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통영은 경상도·전라도 어느 섬이든 떠날 수 있는 요지이고, “아늑한 바다가 좋아서”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또 보길도에 살던 시절, 고향 사람들에게 받은 텃세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서다.

이날 밤 통영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그의 집에서 자고, 이튿날 일찍 섬으로 가는 배를 타기로 했다. 동항에서 가까운 그의 아파트 베란다에선 미륵도를 사이에 두고 오가는 배를 낱낱이 볼 수 있었다. 베란다에 서서 한참 동안 ‘물멍’ ‘배멍’ ‘등대멍’을 했다.

그의 거실엔 특별함이 있었다. 지난해 작고한 어머니의 ‘빼다지(서랍장)’ 위에 놓인 유골함과 위패, 꽃병이다. 위패 안엔 “발이나 얼굴이나 다 같은 한 몸이니 똑같이 소중히 하거라”라는 어머니의 유언이 적혀 있었다

“집에 유골함을 두면 우울감에 빠질 수도 있다고 주변에서 말렸지만, 이렇게 집에 모셔두니 마음이 편합니다. 여전히 어머니와 함께 사는 기분이 들고, 가끔씩 혼자 어머니한테 말을 건네기도 하고요.” 그는 3년 전에 구강암 판정을 받은 어머니를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돌봤다고 한다. 어머니 사망 한 달 뒤, 그가 해온 환자를 위한 식단과 병간호 기록을 정리해『입에 좋은 거 말고 몸에 좋은 거 먹어라』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도 어머니의 유언이다. 부제는 ‘말기 암 어머니의 인생 레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