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와 덩, 두 길 사이에서…시진핑은 ‘묘한 연설’ 했다

  • 카드 발행 일시2023.08.02

제3부: 시진핑의 중국 어디로 가나

제1장: 이념의 마오쩌둥과 실용의 덩샤오핑 사이에서

시진핑(가운데)의 중국 경영은 투사형 지도자인 마오쩌둥(왼쪽)과 관리형 지도자인 덩샤오핑(오른쪽) 중 누구를 닮았나. 시진핑의 치술에선 갈수록 마오의 냄새가 난다. 중앙포토

시진핑(가운데)의 중국 경영은 투사형 지도자인 마오쩌둥(왼쪽)과 관리형 지도자인 덩샤오핑(오른쪽) 중 누구를 닮았나. 시진핑의 치술에선 갈수록 마오의 냄새가 난다. 중앙포토

중국에서 강(江)과 하(河)는 어떻게 구별할까? 물길이 곧으면 강(江)이요, 구불구불 흐르면 하(河)다.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의 구분은 물길의 생김새에 따른 거다. 그렇게 황하가 이리저리 굽이쳐 흐르다 보니 “하동삼십년(河東三十年) 하서삼십년(河西三十年)”이란 말이 나왔다. 한때 황하의 동쪽에 있던 마을이 30년이 지나고 나니 황하의 서쪽에 위치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2012년 집권 이전 중화인민공화국은 대략 60여 년의 역사를 갖는다. 이 60여 년은 크게 마오쩌둥(毛澤東)의 30년과 덩샤오핑(鄧小平)의 30년으로 나뉜다. 마오의 30년이 사회주의 건설의 시기였다면 덩의 30년은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발전의 시기다. 마오 시대는 배는 고프고 자유는 적었지만, 관료는 청렴하고 민중은 단결했다는 말을 들었다.

배는 고팠지만 민중은 단결했다는 마오 시대

덩 시대는 배는 부르고 국력은 신장했으나 관료는 부패하고 빈부격차는 심화했다는 불만을 낳았다. 마오의 30년과 덩의 30년에 이어 새로운 30년을 열려는 시진핑은 과연 어떤 세상을 꿈꾸는 걸까? 마오 시대에 가깝나 아니면 덩 시대와 비슷하나? 그도 아니면 전혀 새로운 길을 걷고 있나? 중국에 “그 말을 듣고 그 행동을 본다(聽其言 觀其行)”는 말이 있다. 우선 시진핑의 말과 행동을 보자.

처음엔 덩샤오핑을 따르는 줄 알았다.

개혁은 그치지 않아야 하고 개방의 걸음도 멈춰선 안 된다(改革不停頓 開放不止步).

2012년 12월 초 중국의 1인자가 된 지 불과 보름여 만에 첫 지방 시찰로 광둥(廣東)성 선전(深圳)을 찾았을 당시 시진핑의 말이다. 덩샤오핑의 동상에 헌화하며 개혁개방을 강조하는 시진핑의 모습은 영락없는 덩의 계승자였다.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 또한 개혁개방의 선구자가 아니었나.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된 직후인 2012년 12월 초 바로 광둥성 선전의 롄화산 공원을 찾아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했다. 당시엔 덩의 노선을 추종하는 것으로 비쳤다. 사진 신화망

시진핑은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 된 직후인 2012년 12월 초 바로 광둥성 선전의 롄화산 공원을 찾아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했다. 당시엔 덩의 노선을 추종하는 것으로 비쳤다. 사진 신화망

게다가 시진핑이 푸젠(福建)성과 저장(浙江)성 등 동남 연해 지역의 수장으로 장기간 근무한 경력으로 볼 때 덩의 개혁개방을 따르는 그의 행보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잠시다. 시진핑은 선전에서 바로 마오쩌둥의 장기인 군중노선을 선보인다. 그에게 다가서는 군중을 경찰이 막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붉은 카펫을 치우고 호텔 스위트룸에도 묵지 않으며 그 자신이 직접 군중 속으로 들어가 함께하는 기풍을 과시했다.

시진핑이 등체모용(鄧體毛用)의 길 걷나

“군중을 위해 군중에 의지해 군중 속으로 들어가자”는 군중노선은 군중의 힘에 의지해 문제를 풀자는 것이다. 마오가 1934년 장제스(蔣介石)의 토벌작전에 밀려 궁지에 처했을 때 천명했다. 실사구시, 독립자주와 더불어 마오쩌둥 사상의 3대 기본 방침으로 일컬어진다. 이처럼 덩샤오핑과 마오쩌둥을 다 아우르려는 시진핑의 모습에 ‘등체모용(鄧體毛用)’이란 말이 나왔다.

시진핑이 덩샤오핑의 실용적인 경제발전 노선을 걷되 정치적으론 군중의 힘에 의존했던 마오쩌둥의 권위주의 스타일을 차용할 것이란 분석이었다. 한데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013년 1월 5일 시진핑은 마오의 30년, 덩의 30년과 관련해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중대 발언을 한다. 당 중앙위원과 후보위원 등 약 300여 명의 고위 당원이 참석한 중앙당교에서의 연설을 통해서다.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30년으로 마오쩌둥의 30년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진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사진 공산당원망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30년으로 마오쩌둥의 30년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진은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천안문 성루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사진 공산당원망

우리 당에는 개혁개방 전(前)과 개혁개방 후(後)라는 두 개의 역사 시기가 있었다… 우리는 개혁개방 후의 역사 시기로 개혁개방 전의 역사 시기를 부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개혁개방 전의 역사 시기로 개혁개방 후의 역사 시기를 부정할 수 없다.

마오 시기의 역사로 덩샤오핑 시기를 부정할 수 없고, 역시 덩 시기의 역사로 마오 시기의 역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덩샤오핑 30년으로 마오 30년 부정 안 돼

언뜻 보기엔 ‘등체모용의 길’처럼 마오와 덩 모두를 끌어안는 절충사관 같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방점은 마오 시기 변호에 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이념적인 계급투쟁으로 일관한 마오 시기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출발한다. 대신 실용주의를 강조한다.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모두 그러한 덩의 노선을 이어받았다. 그런데 시진핑이 이제 와서 마오와 덩의 두 시기가 상호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나?

바로 마오 시대에 대한 긍정의 뜻을 표출하기 위함이다. 사실 시진핑이 말하는 마오 30년과 덩 30년이 서로 부정할 수 없다는 주장은 신좌파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간양(甘揚)이 2007년 일찌감치 밝힌 바 있다. 간양은 현재 중국에는 세 가지 전통이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개혁개방 이래 형성된 시장의 전통이다. 두 번째는 마오 시대 다져진 평등을 강조하는 전통이다.

시진핑은 2021년 11월 발표한 역사결의에서 자신이 집권한 2012년 이후 중국의 신시대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중국 인민일보에 실린 역사결의 전문. 사진 인민망

시진핑은 2021년 11월 발표한 역사결의에서 자신이 집권한 2012년 이후 중국의 신시대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중국 인민일보에 실린 역사결의 전문. 사진 인민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