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좀도둑인줄 알았다” 마트서 찾은 日 치매 공존법

  • 카드 발행 일시2023.07.11

World View

처음엔 좀도둑이라 생각했다. 잡고 보니 초기 치매를 앓는 노인이었다. 일본 도쿄(東京) 하치오지(八王子)시의 대형마트 ‘이토요카도’에선 10년 전부터 물건을 사러 온 노인들이 계산을 마치지 않은 장바구니를 그대로 갖고 나가는 일이 빈발했다. 매장 내에서 과일 등을 그대로 먹어 치우는 경우도 있었다.

하치오지시는 도쿄에서도 고령자 인구 비율이 비교적 높은 지역. 혼자 거동은 가능하지만 인지 장애를 지닌 경증 치매 노인들이 마트를 자주 찾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트 측은 하루 약 300명의 치매 환자가 쇼핑을 하러 온다고 상정하고 이들의 안전한 쇼핑을 돕기 위해 다양한 궁리를 한다. 계산대와 화장실, 계단의 위치 등을 알려주는 커다란 알림판을 곳곳에 설치했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 노인들을 위해 바닥에도 방향을 알리는 스티커를 부착했다. 쇼핑하다 길을 잃은 어르신들이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비상벨까지 설치했다.

일본 도쿄 하치오지시에 있는 대형마트 '이토요카도' 하치오지점. 에스컬레이터를 두려워하는 치매 노인들을 위해 계단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곳곳에 설치했다. 사진 왼쪽 상단에 한자로 쓰인 '계단', 일본어로 계단인 '가이단' 글자와 계단 그림 및 화살표가 그려진 안내판이 보인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 도쿄 하치오지시에 있는 대형마트 '이토요카도' 하치오지점. 에스컬레이터를 두려워하는 치매 노인들을 위해 계단 위치를 알려주는 안내판을 곳곳에 설치했다. 사진 왼쪽 상단에 한자로 쓰인 '계단', 일본어로 계단인 '가이단' 글자와 계단 그림 및 화살표가 그려진 안내판이 보인다. 이영희 특파원

일본은 세계에서 고령화 진행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다. 이는 곧 고령자들이 주로 걸리는 질병인 치매 환자의 비율도 가장 높다는 뜻이다. 내각부에 따르면 일본 내 치매 환자는 2020년 600만 명을 넘어섰고, 2025년엔 7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고령자 5명 중 1명이 치매 환자라는 통계다.

2004년 치매라는 질병의 이미지를 바꾸겠다며 ‘인지증(認知症)’으로 명칭을 변경한 일본은 이제 ‘인지증과 더불어 사는 삶’을 모색 중이다. 아직 치매를 완전히 치료하는 약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내 주변 어디에나 치매 환자가 있다는 걸 인식하고 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용어사전인지증(認知症)

치매의 일본식 명칭. 일본은 2004년까지 ‘치매’라는 말을 사용해왔으나 ‘어리석을 치’(癡), ‘어리석을 매’(呆) 라는 단어가 환자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며 질병의 공식적인 명칭을 인지증으로 변경했다. 인지증은 다양한 원인에 의해 기억력이나 판단력 등 뇌의 기능이 저하된 상태로 알츠하이머형이 전체 환자의 3분의 2에 달한다.

일본 사이타마현 하토야마 뉴타운에서 한 노인이 거리를 걷고 있다. 중앙포토

일본 사이타마현 하토야마 뉴타운에서 한 노인이 거리를 걷고 있다. 중앙포토

정책의 큰 방향 전환을 선언한 것이 지난 6월 14일 국회를 통과한 ‘치매 기본법’(정식 명칭은 ‘공생사회의 실현을 위한 치매 기본법’)이다. 법은 “치매를 앓는 사람들이 존엄을 유지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존중되는 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 일본은 치매와의 공존을 절실하게 찾고 있다. 작지만 꼼꼼한 일본의 해법이 한국 사회에서도 효과를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