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태어났으면 공산당 안해” 아베 놀래킨 시진핑 뜻밖 발언

  • 카드 발행 일시2023.06.14

제2부: 시진핑의 치국책략(治國策略)

제1장: 시진핑과 공산당, 누가 누굴 이용하나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미국 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에게 했다는 말이다. 지난 2월 초 일본에서 나온 아베 총리의 회고록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베는 지난해 여름 피격돼 숨졌고 회고록은 그로부터 반년이 조금 지나 나왔다. 아베는 이 회고록에서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시진핑 주석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담았다.

아베가 처음 시진핑을 봤을 때 시진핑은 마치 준비된 원고에 따라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한데 시진핑 집권 2기에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원고도 없이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이었고 사적인 대화도 나눴다. 시진핑은 이때 자신이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고 "아마도 민주당이나 공화당 양당 중 하나를 선택했을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에게 자신이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진은 2019년 12월 중국을 방문한 아베 당시 일본 총리가 시 주석과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은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에게 자신이 미국에서 태어났더라면 공산당에 가입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진은 2019년 12월 중국을 방문한 아베 당시 일본 총리가 시 주석과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시진핑이 미국서 태어났더라면… 

아베는 이 말을 토대로 시진핑이 결코 "사상이나 신조 때문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진핑은 오로지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을 뿐”이라는 게 아베의 관찰이다. 공산당에 대한 시진핑의 신뢰가 높지 않으며 시진핑은 그저 공산당을 이용해 자신의 손 안에 권력을 쥐려 한다는 것이다. 아베는 그래서 시진핑을 ‘강렬한 현실주의자’라고 봤다. 이 같은 아베의 관찰에 나는 100% 동의한다.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 과연 누가 누구를 이용하나.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서로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시진핑은 이모부 웨이전우(魏震五)의 타이름으로 마음을 잡고 옌촨(延川)현에 내려가 기층생활을 하면서 틈만 나면 입당 신청서를 냈다. 왜? 중국 공산당 일당 체제 아래에서 살아남고 또 출세하려면 입당해서 관리가 돼 권력을 장악하는 게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시진핑은 공산당 입당 신청서를 열 번 낸 끝에 입당할 수 있었다. 사진은 1974년 12월 제4차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대표대회가 옌촨에서 열렸을 때의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넷째가 시진핑이다. 사진 중국공산당신문망

시진핑은 공산당 입당 신청서를 열 번 낸 끝에 입당할 수 있었다. 사진은 1974년 12월 제4차 중국공산주의청년단 단원대표대회가 옌촨에서 열렸을 때의 기념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넷째가 시진핑이다. 사진 중국공산당신문망

하지만 아버지 시중쉰(習仲勳)이 반당 분자로 낙인이 찍힌 상황이라 좌절을 반복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포기하지 않았다. 1972년 8월 다시 입당 신청서를 낸다. 열 번째 입당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100번 총살감’이란 말까지 들었기에 고작 10번 입당 신청서를 내는 건 일도 아니라는 배짱이었다. 결국 20세가 되는 1973년 입당이 허용되고 그해 겨울엔 옌촨현 량자허(梁家河)대대의 당지부(黨支部) 서기가 되며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중국 체제에서 공산당의 위상을 누구보다 더 잘 체득하고 있던 시진핑이 따라서 집권 이후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당의 영도’ 강화를 앞세운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진핑이 어떻게 당을 내세워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는가의 과정을 살펴보자. 2012년 11월 15일 공산당 1인자인 총서기가 된 시진핑은 얼마 후인 12월 광둥성 시찰에 나선다. 시진핑은 여기에서 1991년 붕괴한 "소련의 교훈을 잊지 말자"고 외친다.

2012년 12월 광둥성 시찰에 나선 시진핑은 1991년 소련 붕괴의 교훈을 잊지 말자고 외쳤다. 사진 신화망

2012년 12월 광둥성 시찰에 나선 시진핑은 1991년 소련 붕괴의 교훈을 잊지 말자고 외쳤다. 사진 신화망

시진핑이 꼽은 소련 붕괴 이유 세 가지

중국의 롤 모델인 소련은 왜 망했나. 소련은 공산당원이 20만 명일 때는 정권을 장악했고 200만 명일 때는 파시스트를 물리쳤는데 2000만 명일 때는 오히려 정권을 잃고 말았다. 시진핑은 “당원 비율로 따지면 소련이 우리를 초과하는데 고르바초프의 소련 공산당 해산 선포에 누구 하나 나서서 항쟁한 이가 없었다”고 탄식했다. 소련이 무너질 때 소련 공산당이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7%에 불과했다.

시진핑은 소련 붕괴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는 정치 부패가 만연했다. 두 번째는 이상과 신념이 흔들렸다. 세 번째는 당에 대한 군대의 충성을 잃어버렸다. 당내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만연한 부패와 당의 이념 동요, 그리고 당의 무력 장악 실패가 거대 소련의 멸망을 가져왔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중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당을 다시 다지고 다져 재건해야 하는 것이다. 당의 건설 즉 당건(黨建)이 화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진핑은 소련 붕괴의 원인으로 부패와 신념의 동요, 군대의 충성 상실 등 세 가지를 꼽았다. 사진 셔터스톡

시진핑은 소련 붕괴의 원인으로 부패와 신념의 동요, 군대의 충성 상실 등 세 가지를 꼽았다. 사진 셔터스톡

시진핑의 주장은 당시 중국의 공감을 산다.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濤) 시기를 거치며 크게 두 가지 문제가 부각됐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정책이 중난하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政令不出中南海)는 점이다. 중앙정부의 권위가 떨어져 뭐라 지시해도 먹히지 않는 거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山高皇帝遠)는 말처럼 총서기나 총리가 정책을 세우고 명령을 해도 듣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