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과거의 기록
미국 PGA 투어 공식 사이트 김주형의 프로필에는 지난주까지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SK텔레콤 우승 기록이 없었다. 김주형이 KPGA에서 거둔 2승 중 군산CC 오픈 우승 기록은 있고 아시안 투어에서 거둔 우승, 심지어 아시안 2부 투어 우승 기록도 다 있다. 그러나 SK텔레콤 우승 기록만 없었다.
PGA 투어는 이에 대한 질문에 SK텔레콤 대회 우승 기록만 누락된 건 단순 실수라고 했다. 그리고 김주형 프로필에 SK텔레콤 오픈 우승 기록을 올렸다. 그러나 김주형과 SK텔레콤 간에 앙금이 있던 터라 여운은 남는다.
김주형은 새해 들어 인스타그램에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 설렌다”며 새로운 스폰서인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모자와 옷을 입고 스윙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작년까지 그를 후원했던 CJ 로고가 들어간 사진은 다 사라졌다. 과거 사진을 모두 지운 건 아니다. 개인 스폰서(CJ) 대신 팀 모자를 쓰는 프레지던츠컵 사진은 남겨뒀다. 그러나 김주형의 PGA 투어 2승 우승 트로피 컷을 포함, CJ 로고를 단 사진은 다 내렸다.

지난해 8월 윈덤 클래식에서 PGA 투어 첫 우승을 차지한 김주형. 당시 CJ 로고가 달린 모자를 썼다. AP=연합뉴스
최근 가장 주목받는 선수
김주형은 요즘 PGA 투어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예다. 지난해 2승을 거뒀고, 프레지던츠컵에서 타이거 우즈를 보는 듯한 강렬한 쇼맨십을 보여줬다. 세계랭킹은 14위까지 상승했고 더 올라갈 거로 보인다.
LIV에 스타 선수들을 대거 빼앗긴 PGA 투어에서는 그런 김주형을 백마 타고 온 초인격으로 생각한다. 미국 TV방송 해설자들은 김주형에 대해 극찬하고 미국 언론은 그를 세계 1위에 오를 후보로 보고 있다. 김주형은 지난 크리스마스이브를 골프 슈퍼스타인 조던 스피스 집에서 보냈다고 한다. 김주형의 매너가 워낙 좋아 스피스는 “어찌 이런 선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했다.
나이키는 김주형과 연간 400만 혹은 500만 달러에 5년 계약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타이거 우즈, 로리 매킬로이를 후원하는 최고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가 김주형을 글로벌 스타로 찍었다.
올해도 김주형의 질주는 계속되고 있다. 2023년 PGA 투어 첫 경기인 센트리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공동 5위에 올랐다. PGA 투어 공식 사이트는 13일 시작되는 소니 오픈 우승후보 1순위로 그를 꼽았다.
세계화된 김주형의 이름 ‘톰 김’
김주형은 한국 선수 중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세계 무대에 가장 화려하게 데뷔하는 선수이자 글로벌 스탠더드에 가장 잘 맞는 선수로 보인다. 실력에 더해 쇼맨십도 뛰어나고 능통한 영어로 재미있는 일화들을 들려준다. 콘텐트가 풍부해 미국 기자들이 엄청 좋아한다. 또한 만 스무 살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능숙하다.
이름도 세계화됐다. PGA 투어와 월드골프랭킹 등 공식 사이트에서 그의 이름은 언제부턴가 ‘Joohyung Kim’에서 ‘Tom Kim’으로 바뀌었다. 손흥민·박찬호·박세리·박지성 등 한국 선수들은 공식 명칭에 한국 이름을 썼지만, 김주형은 과감하게 톰 김으로 바꿨다.
그가 한국인에서 세계인으로 가는 걸 응원한다. 그가 이름을 바꾼 것도 잘했다고 본다. 방탄소년단이 BTS가 됐듯 김주형도 틀을 깨고 나와 더 큰 선수가 되기를 바란다. 타이거 우즈는 본명이 엘드릭 우즈다. 일종의 닉네임을 써서 자신의 가치를 높였다.
김주형은 “양용은이 우즈를 꺾고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보고 실망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타이거 우즈를 동경했기 때문이라는데 충분히 이해한다. 맹목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 최고를 보고 배우며 따라잡으려는 글로벌한 자세를 갖고 있어서 더 멋져 보였다.

센트리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경기하는 김주형. AFP=연합뉴스
성장 환경도 글로벌 스탠더드
김주형은 글로벌하게 컸다. 한국에서 태어나자마자 중국으로 이주해 자랐고 호주, 필리핀, 태국에서 골프를 했다. 3개 국어에 능통하다. 16세에 필리핀 프로 투어에 참가했고 2019년 아시안 2부 투어에서 3승, 아시안 투어에서 1승을 올렸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로 아시안 투어가 사실상 문을 닫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만 18세에 KPGA 군산CC 오픈에서 우승했고 대상, 상금왕에 오르는 등 파란을 일으켰다. 김주형은 지난해 PGA 2부 투어를 거치지 않고 PGA 투어로 직행하는 바늘구멍을 뚫었다. 하반기 PGA 투어에서 2승을 거뒀는데 특히 첫 우승을 할 때는 1라운드 첫홀에서 쿼드러플 보기를 하고도 5타 차 우승을 했다. 1997년 마스터스 1라운드 전반 9홀에서 4오버파를 쳤으나 결국 12타 차로 우승한 우즈가 연상됐다.
김주형은 이어진 프레지던츠컵에서는 인터내셔널 팀의 실질적인 리더였다. CJ컵에서는 기자석에 앉아 로리 매킬로이에게 골프 선수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직접 질문해 화제가 됐다. 매킬로이는 김주형을 매우 좋아하게 됐다.

지난해 9월 열린 프레지던츠컵에서 중요한 퍼트를 넣고 환호하는 김주형. EPA=연합뉴스
한국과 거리두기?
그러나 글로벌 스타가 되는 과정에서 한국과는 서서히 거리를 두는 듯하다. 골프계에서는 김주형이 한국 대회엔 상당히 오랫동안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 미디어와의 소통 채널도 좁아지고 있다. 지난가을 CJ컵에서 김주형은 한국어 인터뷰를 원하는 국내 방송 기자를 실망시켰다. 일련의 사건을 보면 김주형은 한국에서 활동할 때, 또 한국 기업의 스폰서를 받으면서 서운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의 일을 복기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SK텔레콤 오픈이다. 2021년 KPGA SK텔레콤 오픈에서 우승한 김주형은 이듬해 대회에 불참하고 아시안 투어에 나갔다. KPGA는 전년도 우승자가 대회에 출전하지 않으면 벌금 1억원을 징수하고 상벌위원회에 회부한다. 김주형 측은 “PGA 투어 진출을 위해 꼭 필요한 대회에 나가니 벌칙 없이 보내 달라”고 했다. 보도에 의하면 김주형 측은 “KPGA가 ‘먼저 후원사의 허락을 받아 오라’고 하고, SK텔레콤에 연락하면 ‘KPGA에 가서 알아보라’는 식으로 타박만 들었다”고 했다. 결국 김주형은 허가 없이 1억원을 공탁금 비슷하게 KPGA로 보내고 아시안투어 대회에 참가했다. KPGA는 1억원을 김주형에게 돌려줬다.
KPGA는 해외 투어에 나가는 전년도 우승자를 징계 없이 보내준 선례가 있다. 그러나 SK텔레콤과 KPGA가 선뜻 허락하기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나 싶다. KPGA에서 페널티 없이 보내준 건 주로 PGA 투어와 유러피언투어 대회에 나간 경우였다. 큰 대회에 나가니 허락해 준 거다.
김주형이 나간 대회는 KPGA가 라이벌로 생각하는 아시안 투어 대회였다. 김주형이 나간 대회가 아시안투어치고는 큰 대회였다고 해도 KPGA는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PGA 투어는 라이벌 투어인 LIV 대회에 나가는 선수를 영구제명하지 않는가.

김주형이 2021년 SK텔레콤 오픈에서 트로피를 들고 있다. 사진 KPGA
CJ 지워버린 톰 김
CJ와 김주형은 재계약 협상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CJ 측에서는 가능한 한 적은 돈으로 그를 잡고 싶고, 김주형 측에서는 많은 돈을 원했을 것이다. CJ가 우선협상자로서 지나치게 시간을 끌었거나 그의 가치에 걸맞지 않은 요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막이 어떻든 사진을 지운 건 좀 감정적인 처사로 보인다.
새로운 스폰서인 나이키가 이전 스폰서 사진을 모두 삭제하라고 요구하지는 않은 것 같다. 김주형 측에서는 “새로운 스폰서와 시작하면서 새롭게 리셋해 가려 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주형 측은 또 “CJ컵 인터뷰 건은 한국 기자들이 인터뷰룸 아닌 곳에서 자꾸 인터뷰를 요구해 생긴 일”이라고 해명했다. 기자들 얘기는 좀 다르다. 그러나 설령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았더라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까지 간 취재진에게 그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난주 센트리 토너먼트 오브 챔피언스에서 일찌감치 경기가 끝났는데도 김주형 혼자 땅거미가 질 때까지 연습했다고 한다. 타이거 우즈를 흠모하며 그만큼 노력하는 그가 우즈 이상으로 뛰어난 스타가 되기를 바란다.
김주형은 10대를 외국에서 보냈다. 남의 나라에서 살면서 텃세도 겪었을 텐데, 기대했던 고국에서 실망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월드스타로 크기 위해서라도 세계인 톰 김은 한국인 김주형을 보듬고 가야 한다. 김주형뿐 아니라 톰 김에게도 한국은 가장 큰 응원군이다. 그를 가장 뜨겁게 사랑할 팬들은 한국인이다. 재미교포 골프 선수인 케빈 나는 “미국에서는 (아시아계를) 미국인 취급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나를 미국인 취급하면 갈 곳이 없다”고 했다.
그의 스폰서도 톰 김이 김주형을 지우길 원치 않을 것이다. 나이키도 한국에서 영업하고 있고 PGA 투어에도 한국은 중요한 시장이다.

2020년 KPGA 군산CC 오픈에서 KPGA 첫 우승을 차지한 후 기뻐하는 김주형. 사진 KPGA
지금 보면 큰돈은 아니겠지만 CJ의 스폰서와 SK텔레콤 우승 상금도 어렵게 자란 그에게 도움이 됐다. 그의 PGA 투어 진출에 결정적인 발판이 된 대회는 제네시스 스코티시 오픈이다. 김주형은 현대차 초청으로 참가했다. 그가 한국에 와서 골프 흥행에 도움이 됐지만 반대로 그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받지 못했을 혜택도 많다.
한국 기업과 KPGA가 김주형에게 야박하게 하고 미디어도 잘 못 한 부분이 있을 거다. 그러나 미국을 포함, 세상 어디도 완벽하지는 않다. 한국과 함께한 사진을 지운다면 그의 PGA 투어 2승 사진도 없어진다.
김주형이 어려울 때 안식을 취할 곳은 한국뿐일지도 모른다. 코로나로 인해 아시안 투어가 황폐화됐을 때 그가 돌아온 곳이 한국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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