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리 행정조정실,과기처,농촌진흥청,축협중앙회
◇총리 행정조정실^중앙공무원교육원 파견 朴元出 ◇과기처^컴퓨터프로그램심의조정위원장 洪載憙 ◇국세청〈사무관〉^국세청 직세국법인세과 朴鍾太^서울지방국세청 징세관실 鄭煥萬^同 재산세국
-
영남일보,산업은행,광주은행,동남은행
◇영남일보^상무이사 金相台^이사대우 논설주간 朴容圭^논설위원皇甫武一^同 金貴子^편집국장 呂源淵^편집부국장겸 서울취재본부장梁正奉^편집부국장 文勝雄 黃光淵^부국장대우 교열부장 張聖鉉^
-
대법원,헌법재판소,고려대,울산대,매일경제신문
◇대법원〈승진〉^서울고등법원 사무국장 金祚漢^법원행정처 송무심의관 南丙根^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 사무국장 金河燮^춘천지방법원 사무국장 金貞洙〈전보〉^대전고등법원 사무국장 金丙植^대구
-
김호,박정식,유기범,한수진,현경대,홍한유
◇金 湖 前中央日報편집부국장은 최근 서울 언론인클럽에서 수여하는「언론인 한길賞」수상자로 선정됐다. 시상식은 19일 오후6시30분 한국프레스센터 19층. ◇金熙執 고려대 총장은는 1
-
경남은행,서울신탁은행,효성여대,덕성여대,경향신문
◇경남은행〈부장〉^융자 宋圭永^영업 李長佶^고객 鄭永峻^관리鄭成國^국제 金 哲〈지점장〉^부산 金正雄^창원 梁榮照^육호광장卞勝己^용호동 韓相德^명곡 金光洙^양덕동 陳求鎬^전하동 柳忠
-
한국전기안전공사,농림수산부,대법원,특허청,한국통신
◇한국전기안전공사〈실장〉^기획 金虎淵^행정 安國榮^인력개발 鄭夏圭^업무 鄭海南^홍보 朴鳳瑞〈지사장〉^강남 鄭泰昇^영등포 趙漢成^성서 白萬基^인천 趙泰元^강릉 晋元鐸^충북 金炯燮^전
-
보사부,성균관대,통일원,대한교원공제회,KBS제작단
◇보사부^국립소록도병원 서무과장 李相泳^기획관리실 기획예산담당관실 高景錫^사회복지정책실 생활보호과 李俊根^同 노인복지과 張玉珠^보건국 보건교육과 李在天^의정국 의료정책과 李啓隆^同
-
특허청,한국일보,공정거래위원회,신용관리기금등
◇공정거래위원회^조사국장 申茂成 ◇신용관리기금〈부장〉^경영분석 金政洙^금융 金賢德〈실장〉^감사 崔信德^비서 金寅燮 ◇경기은행〈부장〉^업무추진부 金鍾植^관리부 尹興老〈지점장〉^수원
-
한국능률협회,체신부,경남은행,대전매일신문,교통신문
◇한국능률협회〈부장〉^경영지원본부 본부장 蔣昇圭^품질경영본부張在榮^국제협력본부 金東憲^사업기획본부 金承燁^산업교육2본부 金奭顯 ◇체신부^경북체신청장 曺弘^중앙공무원교육원파견 李哲聖
-
(35)「해직자의아픔」사회 문제로
80년 여름, 졸지에 직장을 잃은 9천여 해직공직자들은 모두 깊은 좌절 속에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빨리 직장을 찾은 사람도 있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술과 통분
-
"부처님도 사람따라 설법하라했다" 김대중씨,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 일문일답
30일 밤 열린 김대중평민당창당준비위원장 초청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김위원장은 김경철중앙일보논설위원·김대중조선일보논설위원·장명수한국일보편집부국장·박성범KBS보도본부부본부장등 4명의
-
김대중 민추의장 집중 인터뷰|"정치보복 앞장서서 막겠다"
질문에 답변하는 김대중민주당고문은 막힘이 없었다. 간간이 『어려운 질문인데…』라며 잠깐씩 뜸을 들이긴 했지만 정치는 물론 경제·사회·문화·여성등 다방면에 걸쳐 나름대로의 소견과 논
-
방화·폭행 26명 구속|한대·조선대 사건-23명 수배…치밀한 사전 준비
한양대 안산 캠퍼스와 조선대생들의 방화·폭행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과 경찰은 두 사건 모두 치밀한 사전 모의와 준비를 거친 계획적인 범행임을 밝혀내고 주모자와 배후 세력 색출, 방
-
12대국회 각 당 초선의원 프로필
오랜 정치부기자의 경험을 살려 신한민주당의 초대대변인이됐다. 두뇌회전이 빠르고 문장이 좋은편. 미국유학도 했고 『한국외교비사』등 몇권의 저서도 있으며 5·17후 한국일보에서 해직됐
-
계엄사 발표 김대중 등 내란 음모 사건 수사결과 전문
계엄사령부는 7윌4일 김대중과 그의 추종분자일당이 획책하여온 내란음모사건에 대한 수사를 일단락 짓고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우선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국환관리법 및
-
(14)가장 길었던 3일(14)|「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
6월25일 아침부터 28일 새벽 2시반에 한강다리가 폭파될 때까지 서울시경 산하의 5천여 경관이 어떻게 움직였는가를 당시의 몇 시경찰관들의 증언을 통해 다시 알아보자. ▲이계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