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둘째 주 <71호>

여러분은 지금까지 이사를 몇 번 하셨나요? 잠시 살았던 동네에 가더라도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지요. 자주 가던 식당이 바뀌어 있으면 괜히 섭섭해지고, 아는 가게를 발견하면 반갑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추억은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37년 전 살았던 아파트를 다녀온 조남대 필진의 추억 이야기입니다.


조남대의 은퇴일기(8) 2021.02.04
신혼 살림 차렸던 아파트 문간방, 37년만에 가보니


날씨가 추운 데다 코로나19 때문에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다. 집안에서 주로 생활하다 보니 생각할 시간이 많아져 옛 추억이 떠오른다. 결혼 후 사십여 년 동안 보금자리를 십여 곳 이상 옮겨 다니며 살아왔는데 전에 설던 동네가 어떻게 변했을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후 가장 추억이 많았던 세 곳을 가보기로 했다. 옛날 주소를 확인한 다음 설레는 마음으로 출발했다. 주민등록초본에 두 장이 넘칠 정도로 주소 변동사항이 많다. 부부가 모두 직장을 다녀 아이들을 돌봐주던 이모를 따라 이사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제일 떠오르는 곳은 신혼살림을 차린 용산 서부이촌동이다. 결혼 전 방 세 칸인 아파트에 문간방 하나를 얻어 자취했었다. 결혼하고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 자취방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주인이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나면 눈치를 봐 가며 부엌을 사용하곤 했다. 이런 불편함 때문에 쉬는 날이면 등산을 가거나 야외로 나갔다. 때로는 등산용품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행복해했다.

한번은 여름철에 주인 식구들이 휴가를 떠나면서 문단속과 절전을 부탁했는데, 우리도 며칠 지나 휴가를 가면서 철저하게 한답시고 냉장고 코드까지 뽑았다. 주인아주머니가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를 보자마자 갑자기 화를 내는 바람에 영문도 모르고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었다. 아뿔싸! 냉동실에 넣어 둔 고기가 모두 상했다는 것이다. 어렵던 시절이라 절약 정신이 배어 있는 데다 처음 사용해 보는 냉장고라 그런 일도 있었다. 지금 젊은 세대는 잘 믿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퇴근할 때면 버스 정류소까지 마중 나온 아내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왔고, 주말에는 한강 변으로 나가 산책을 하기도 했다. 비록 가진 것은 적었지만 부러울 것 없이 오순도순 행복한 신혼 시절을 보낸 곳이다.

다시 찾아 가보니 우리가 37년 전 1년 동안 살았던 아파트는 아주 낡은 모습으로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주변은 모두 신축아파트 단지로 변해있었다.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아파트 계단을 통해 옥상에도 올라가 보았다. 그때는 한강이 한눈에 들어왔었는데 고층 아파트가 가려 답답하다. 당시 한집에 살았던 주인 부부는 아직도 그곳에서 살고 있을까? 초인종을 누르고 확인해 보지 않고 돌아온 것이 못내 후회스럽다. 지금은 거의 팔십 대의 어르신이 되었을 텐데 어디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진다.

아쉬움을 남긴 채 첫애를 낳고 무척 행복했던 신길동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녀원 부근 단독주택 2층에 방 2개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겨울에는 너무 추워 방안에 석유 난로를 피워야 할 정도였고, 아들의 양 볼은 터 늘 발그레했다. 집 바로 앞에는 넓은 테니스장이 있어 휴일에는 게임을 하는 것을 재미있게 구경했다.

테니스장에는 이제 영등포스포츠센터가 들어서고 집 옆은 공원으로 바뀌어 완전히 탈바꿈했고, 인근에는 신풍역이 생겨 초역세권이 되었다. 다만 36년 전 우리가 살던 단독주택을 포함해 주변 3채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생뚱맞은 느낌이 든다. 육아 초보 시절, 밤에 아들이 아프면 주인아주머니께 도움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기도 하며 3년 동안 추억이 많이 쌓인 곳이다.

어느 날 단잠을 자는 아들을 두고 잠깐 손님 배웅하느라 도로변까지 나왔다가 돌아오는데 세 살짜리 아들이 2층 난간에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엄마, 아빠를 보고 계단을 내려오다 떨어지면 큰일 날 것 같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쏜살같이 뛰어갔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아내 산후조리 해준다고 방문한 장모님과 한 달 동안 지내면서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던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내는 일생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며 가끔 그때를 그리워한다.

애들을 돌봐주던 분(우리 가족은 이모라고 부른다)이 내발산동으로 이사하자 우리도 부근으로 또 따라갔다. 방 3개가 있는 4층 신축 빌라다. 결혼 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내 집을 마련해 들어간 곳이라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빌라 뒤 주차장에서 주민들끼리 삼겹살을 구워 파티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이모네 집이 재건축하는 바람에 우리 집으로 들어와 방 2개를 내어주고 3년을 함께 살았다. 두 집 식구 10명이 살을 부대끼며 허물없이 지냈다. 대식구 속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들과 딸은 정이 듬뿍 들어 3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이모 부부의 생신이나 애경사에 잊지 않고 참석하거나 축하 인사를 드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때는 전혀 불편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재미있고 좋은 추억만 생각난다.

우리가 살았던 빌라는 페인트칠을 다시 해서 깨끗해졌지만, 주변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추억을 더듬으며 우장산 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송화 시장에 가서 신선한 야채도 샀다. 공항로 주변의 논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비닐하우스 식당에서 오리고기를 구워 먹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스케이트 타던 논에는 대학병원이 웅장한 모습으로 들어섰고, 비닐하우스가 있던 들판은 첨단 회사와 고층 아파트가 자리를 잡았다. 논 가운데 정차하지 않고 통과하던 마곡역은 직장인과 주민들로 붐비고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상전벽해라 할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가 살았던 집들은 모두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한 세대가 지났는데도 꿋꿋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덕분에 옛 추억을 고스란히 끄집어내어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어서 흐뭇했다. 함께 지냈던 분의 근황이 궁금하고 그립긴 하지만 추억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다. 어디에 계시든 만수무강하기를 빌어 본다.

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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