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비타민] 극장에 걸리지 않을 영화를 만든다는 것…멕시코 한인 이주 역사 담은 정연두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주말을 보다 풍성하게 만들어줄 뉴스레터 서비스 ‘문화 비타민’입니다. 매주 금요일 음악ㆍ방송ㆍ영화ㆍ문학ㆍ미술 등 각 분야를 담당하는 중앙일보 문화팀 기자들이 놓치면 아쉬울 문화계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이번 주는 영화ㆍOTT 담당하는 권근영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극장에 걸리지 않을 영화를 만든다는 것…
멕시코 한인 이주 역사 담은 정연두
"난 옛날에 50명분의 밥을 지었어. 밥 하는 건 챔피언이야. 난 시집을 일곱 번을 갔어."
화면 속에선 판소리 공연이 한창입니다. 멕시코 이민 2세인 마리아 빅토리아 리 가르시아(1907~95) 할머니의 굴곡진 인생 역정을 판소리 사설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옆 화면에선 멕시코 마리아치 공연자들, 또 다음 화면에서는 일본 기다유 분라쿠(義太夫 文樂) 공연자들이 자기 순서를 기다립니다. 가운데 큰 화면에서는 멕시코의 풍광을 담은 영상이 흘러갑니다.
'백년여행기'를 보는 관객들. 정연두 작가는 "멕시코에서 이국적인 모습의 한인들이 8·15 광복절 행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돌아봤습니다. 권근영 기자
판소리ㆍ마리아치ㆍ기다유로 릴레이하듯 이어지는 공연엔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의 사연이 담겼습니다. 1905년 영국 상선 일포드호에 올라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치는 40일의 항해 끝에 멕시코에 다다른 여정입니다. 당시 일포드호에서 태어난 최병덕(1905~85)의 『교포역설』(1973), 황성신문의 이민자 모집 광고, 멕시코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보영주(1895~1959)의 시 '나의 길'(1912)을 토대로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어 관련된 나라의 전통 공연자에게 의뢰한 겁니다.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54)의 신작 ‘백년여행기’(2023)입니다.
19일 오후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 평일임에도 전시실엔 젊은 관객들이 많았습니다. 외국인들도 보였습니다. 관객들은 4대의 모니터에서 48분 동안 펼쳐지는 이 독특한 공연 영화를 전시실 바닥에 놓인 빈백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지켜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