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말라깽이 못 믿었다…런던을 박살 낸 ‘활의 침공’

  • 카드 발행 일시2024.03.08

“당신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잖아요!”
1970년대 영국의 한 TV 진행자가 토크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은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1948년생)입니다. 놀라운 연주와 경력으로 대한민국의 대표 음악가가 된 정경화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정경화의 음악에는 뜨거운 불이 있습니다. 완전히 몰입한 경지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소리가 들립니다. 이번 음악 분석에는 바이올리니스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정경화의 뜨거움에 반해서 30년째 열성 팬인,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1985년생, 노부스 콰르텟 리더)이 함께합니다. 이제 정경화의 뜨거움을 체험해 보겠습니다.

서울·뉴욕·런던에서 시작해 전 세계가 열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떠올랐던 정경화. 중앙포토

서울·뉴욕·런던에서 시작해 전 세계가 열광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떠올랐던 정경화. 중앙포토

잠시 1970년 5월 13일 런던으로 가보겠습니다. 공연은 오늘 저녁. 지금은 오후 3시.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습이 예정돼 있습니다. 공연이 불과 몇 시간밖에 안 남았지만, 이날이 첫 연습입니다. 오늘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대타’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공연하기로 했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아내가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에 공연을 취소하고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비쩍 마른 22세의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연습하러 도착했습니다. 스타 지휘자도 왔고요. 그런데 오케스트라는? 단원 중 3분의 1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연습 시간을 잘못 알고 공연장에 못 왔답니다. 난감해하던 지휘자는 바이올리니스트를 슬쩍 쳐다봅니다. 작은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연주를 잘할지 미심쩍습니다. 지휘자는 친절하게 말합니다. “오늘 공연은 취소하자. 다른 날짜를 잡아줄게. 너의 유럽 데뷔 무대인데 이렇게 제대로 연습도 못 하고 무대에 올라가는 건 불공평해.”

아뇨, 공연은 그대로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스타가 이날 탄생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분명한 것은 작고 낯선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날 차이콥스키 협주곡으로 런던을, 그리고 유럽을 사로잡았다는 겁니다.

아마도 별 기대 없이 왔을 런던의 청중은 작고 깡마른 이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홀딱 반했습니다. 이날 이후 정경화의 인기는 마치 팝콘이 튀겨지듯 치솟아 올랐습니다. 이날로부터 2주 동안에 2년치 유럽 공연이 잡혔고요, 영국에서만 30회 공연을 계약했습니다. 빈·베를린·파리·도쿄·텔아비브까지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전 세계의 화려한 무대가 그를 모시기 위해 줄을 섰고, 연주는 한 해 120회에 달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흘에 한 번 전 세계를 돌며 무대에 섰던 겁니다. 다시 나오기 힘든 경력이고, 기록입니다.

1970년 정경화의 데뷔 무대에 함께했던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오른쪽). 중앙포토

1970년 정경화의 데뷔 무대에 함께했던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오른쪽). 중앙포토

도대체 어떤 음악이고 어떤 소리였기에 이런 난리가 났을까요? 그 소리는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요? 무엇보다 지휘자가 취소하자고 했던 공연은 어떻게 그대로 열린 걸까요?

런던 공연의 실황 음원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바로 뒤이어 같은 해에 녹음한 음원은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오케스트라와 지휘자가 등장하는 연주곡입니다. 그중에서 이 부분을 들어보세요. 정경화 특유의 찌르고 솟아오르는 소리입니다. 정경화가 런던을 들쑤시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4분 56초부터 재생되는지 확인해 보세요〉

그날 공연을 취소하자던 지휘자에게 정경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